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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랑 Oct 20. 2020

세상살이 뭐 다 그런거지 뭐

환갑맞이 가족여행

병원 창문으로 내다보았던 보름달. 

입원 병동은 7층이었던 것 같다. 꽤나 높은 곳에 자리 잡아서, 거무스름한 치악산 위로 노랗고 동그란 보름달이 떠오르는 걸 물끄러미 내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막내가 스무살 무렵, 까닭 없이 크게 아팠다. 온몸이 퉁퉁 붓고, 간수치가 치솟았다. 폐기능이 떨어져서 숨 쉬기를 힘들어했고, 다른 장기의 기능도 떨어졌다. 의사는 '오늘밤이 고비',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말을 던졌고, 어머니는 병문안을 온 친구분을 붙잡고 어마어마한 눈물을 쏟아내셨단다.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보지도 않았는데, 마치 내 눈으로 본 것처럼, 그 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본 것 중에 기억 나는 건 딱 하나. 

막내를 일년 동안 원주 특수학교로 통학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이제는 바빠서 머리를 묶어줄 수 없다며, 우리 자매의 머리를 자르던 날. 아침마다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예쁘게 머리를 묶어주셨던 어머니. 아침 먹은 설거지도 하지 못한 채, 부랴부랴 버스를 타야했던 처지에 딸들 머리를 묶어줄 새가 있었을까. 고무줄로 묶은 다음, 옷감을 잘라내던 큰 가위로 꽁지를 썩둑 잘라내던 소리와 질감이 생생하다. 더 생생한 건, 내 뒤에서 숨죽여서 흐느끼던 엄마의 목소리. "이제 엄마는 바쁘니까 머리 못 묶어줘. 너희가 알아서 머리 잘 빗고 다녀." 차마 뒤돌아서 어머니의 우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동생 머리까지 자르고 나서 어머니는, 울음을 그치며, 옆에 놓인 걸레를 집어 콧물을 쓱 닦았다. 걸레로 콧물을 닦다니. 참으로 우리 엄마 답다며, 동생과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웃음을 터뜨린다.


심장 기능이 떨어지고 숨이 찬 동생을 휠체어에 태워 병동 복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에 나도 베개가 다 젖도록 울다 잠들었다. 내색을 하지 않고, 막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루한 막내를 달래려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까닭을 알 수 없었던 막내의 병은, 의외로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갑상선기능저하증' 피 검사 항목에서 빠져서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오래되면 장기의 기능이 떨어져서 항진증보다 더 위험하다는 병이었다. 부족한 갑상선 호르몬을 보충해주는 약을 먹으며, 막내는 빠르게 나았다. 


제1형 당뇨에 갑상선기능저하, 심장약, 뇌전증약까지 챙겨 먹는 막내.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베네치아에 도착해서 카레를 저녁으로 먹고, 먹은 걸 다 토했다. 모든 걸 다 게워낼 것처럼 토했다. 화장실에서 오옥, 하고 토하는 소리를 들으며, 후회했다. 괜히 이렇게 길게 여행을 잡았나, 막내에게 너무 무리였나, 내 욕심이었구나, 온갖 생각이 들었다. 막내는, 자기는 이제 파스타는 먹지 않겠다, 밥을 다오, 선언을 했다. 안 그래도 아침과 저녁은 숙소에서 밥을 해 먹고, 점심만 바깥에서 먹는데, 점심도 밥을 먹겠다는 건가.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괜히 데리고 왔나. 이런 저런 걱정을 안고 잠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멀쩡하게 밥 잘 먹고 생생하게 숙소를 나섰다.


24시간권을 알뜰하게 쓰려고 바포레토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확실히 어제가 제일 더운 날씨였다. 여름이라 뜨거운 태양은 어쩔 수 없지만 습도가 어제보다 덜해서 걸어다니기 괜찮았다. 부라노섬은 알록달록한 집이 보기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생각보다 실용적인 까닭으로 색색으로 칠했는데, 안개가 심하게 낀 날, 바다에서 집을 잘 찾아오라고 페인트 칠을 했단다. 


7년 전 기억을 더듬어, 혼자 배부르게 파스타를 먹었던 식당을 찾아냈다. 어딘가 눈에 익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거짓말처럼, 7년 전 모습 그대로 식당이 나타났다. Bar Sports. 깔라마리, 봉골레, 마르게리따 피자, 라구 스파게티, 호박 스프까지 푸짐하게 시켜먹었다. 깔라마리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부라노섬을 누볐다. 아버지는 남의 집 앞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는게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지만 잘 따라오셨다. 


다시 본섬으로 돌아와 리알토 다리도 건너보고,  곤돌라도 탔다. 15분 남짓 타는데 100유로라 탈까 말까 망설였지만, 이때 아니면 또 언제 타겠나. 다섯 식구가 곤돌라에 올랐다. 극성수기라 곤돌리에가 바쁜지,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에, 노래도 부르는 둥 마는 둥. 괜히 탔나, 싶을 때, 막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워낙 흥이 많은 녀석이라, 아저씨가 노래 부르는 걸 듣고 흥이 오른 모양. 막내가 부른 노래는 바로,




사는게 뭐 별거 있더냐

욕 안 먹고 살면 되는거지

술 한잔에 시름을 털고

너털웃음 한 번 웃어보자 세상에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 길을 잃은 사람아

미련따윈 없는거야 후회도 없는거야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살이 뭐 다 그런거지 뭐

(시계바늘, 신유)



베네치아 운하에 울려 퍼지던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소리란. 온 가족이 웃음이 터졌다. 몇 곡을 신나게 더 부르고 리알토 다리에서 노을이 지는 걸 보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젤라또를 사 먹고, 막내에게는 이탈리아 해군 모자를 사주었다. 여행 내내, 막내의 모자를 보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카피타노'라고 부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카피타노'는 영어로 '캡틴'이란 뜻. 막내는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자전거를 타러 나갈 때면 꼭 '카피타노'모자를 챙겼다. 짧아서 아쉬운 베네치아 여행을 끝내고, 내일은 피렌체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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