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1년
1년. 살면서 처음으로 수술한 지 1년이 지났다. 1년 전 오늘, 최수진 전시회도 보고, 혼자 점심 먹으며 책 한 권을 다 읽고, 작은 캐리어에 갈아입을 옷, 씻을 것 등등 자질구레한 것을 넣어서, 힘차게 끌며 안암동 언덕길을 올라갔다 내려가서 병원에 닿았다.
시작은 건강검진이었다. 2년에 한 번 건강검진을 꼭 해야 하는데, 짝수년생이라서 짝수해인 22년에 이미 검사를 했다. 작년은 일을 한 해 쉬어가는 해였는데, 동생이 자기 건강검진할 때 같이 하자고 졸랐다. 자기랑 같이 하면 50% 할인해서 받을 수 있다며,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더 자세하게 건강검진을 하잔다. 작년에 했으니까 안 하겠다고 했는데 하도 졸라서 그래, 하자, 하고 건강검진을 했다. 병원에 산부인과가 없어서 하복부초음파를 했는데, 난소에 뭐가 보인단다. 결과를 들은게 아마도 8월 초 였던 것 같다.
워낙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면, 난소는 항상 깨끗하다고 했던 터라,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혹이 있을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만 하고 미루다가, 원래 다니던 병원이 아닌, 대기 시간이 없는 산부인과에 갔다. 초음파에 진짜 혹이 보인다고 했을 때도, 별 생각이 없었다. 초음파 영상을 CD에 담아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큰 병원에 가기 전에 원래 다니던 병원에 가서 다시 초음파를 했는데, 역시나 혹이 있단다. 바로 옆에 영상의학과에 가서 CT를 찍으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영제를 맞아보고, CT를 찍었다. 조금 늦은시간이라, 영상의학과 선생님에게 영상 해석은 못 들었다. 나중에 연락이 와서 또 큰 병원에 날짜를 잡아주신다고 해서, 이미 잡혔다고 말씀드리고, 영상을 담은 CD를 들고 병원에 갔다.
큰 병원에서도 난소에 혹이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했다. 12월에 친구과 네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터라, 철 없이 수술을 1월에 할 수 있냐고 물어서, 1월로 날짜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듣고, 동생, 친구들이 난리가 났다. 왜 더 큰 병원에 가지 않느냐, 검사를 더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여기서 수술 해도 될 것 같은데.' 생각했지만, 동생 말을 듣기로 했다. 다행히도, 서울 병원에 예약이 금방 잡혀서 또 검사. 병원을 다녀보니, 끝없는 검사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묵묵히 인내심을 가지고, 병원에서 여기 가라면 여기 가고, 저기 가라면 저기 가는 일의 이어짐. 서울 병원에서도 같은 의견. 수술 날짜가 11월 23일로 잡혔다. 더 빠른 곳에서 하기로 마음 먹었다. 네팔 여행은 취소했다.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도저히 수술을 하고 한 달만에 여행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건강검진부터 수술까지, 만약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네팔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상상만해도 대단하다. 정말로. ㅎㅎㅎ
수술 날을 잡아 놓고, 제일 마음이 쓰인 것은 보호자였다. 날을 잡고는 부모님에게도 말씀드렸다. 그 전까지는 말씀 드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실 것 같아서였다. 어머니가 보호자로 오자니, 어린 조카를 돌볼 사람이 없다. 아버지도 일을 하시고, 가게를 닫고 보호자로 오신다고 해도, 평생 누구 수발을 들어 본 적 없는 양반이다. 그런 아버지가 "내가 갈까?" 했을 때는 뜻밖이었다.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보호자는 결국 동생이 하기로 했다.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와주기로. 1인가구인 사람은 수술보호자 동의를 누가 하나? 왜 꼭 보호자가 해야 하나? 천애고아면 누가 보호자를 해? 그럴 때도 보호자의 수술 동의가 필요해? 1인가구가 점점 많아지는데, 언제까지 수술 보호자 동의라는 제도를 이어나가야 하나? 온갖 불만이 터져나왔다.
22일 오후 4시에 병실에 입원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실에 오도카니 앉아있는데, 참으로 어색했다. 병원 밥이 꽤나 맛있어서 잘 먹었다. 그때부터 금식인데, 옆에 사람들은 너무나 맛있는 병원밥을 먹어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아니 병원이 맛집일 줄이야? 반계탕에, 시금치 매운 돼지고기 덮밥에.....하.....
수술동의서를 보호자가 써야 한다고 하더니, 혼자 왔고, 동생은 내일 온다는 소리에 나보고 사인하란다. 아니, 보호자가 꼭 와야 한다며!! 걱정과는 달리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물론, 밤새 혈압과 혈당을 재느라 그때마다 깨긴 했는데, 그래도 잘 잤다. 수술 하기 전 밥을 사준 동무들과 병실에서 물 마시려면 텀블러가 필요하다며 예쁜 텀블러를 선물해 준 동무들이 떠올랐다. 새벽에 물을 나누어주는 분이 부드럽게 깨우시더니 따뜻한 물을 텀블러에 담아주셨다. 아침부터 수술 준비하라고, 속옷 다 벗고 환자복만 입고 기다리라고, 머리를 양갈래로 땋으라고 했다. 어설프게, 헐렁하게 머리를 땋았는데 그 모양새가 웃겼다. 아버지를 닮아 흰머리가 많은데, 흰머리가 성성한 머리카락을 땋으니 그게 또 어색해보이기도 했고.
동생이 9시쯤 왔다. 내가 머리 땋은 모양새를 보고 다시 땋아주었다. 한 쪽은 동생이 땋은 쫌쫌따리, 한 쪽은 아침에 내가 땋은 헐렁한 머리를 보니 둘 다 웃음이 터져서, 커튼을 친 침대 위에 앉아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게 왜 그렇게 웃겼던지, 아주 오줌 쌀 정도로 웃었다. 결국 수술은 1시에 들어갔다. 침대를 수술실까지 밀어주러 오신 분에게 "앉아서 가도 돼요?" 물으니 안 된단다. 누워서 가는게 너무 어색했기 때문이다. 동생이 따라와서 보호자 대기실에 들어갔다. 수술실은 추웠다. 환자복을 벗고 수술대 위에 누우니 기다란 종이로 몸을 가려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벗은 몸으로 수술대 위에 올라가면서 깨달았다. 아, 인간의 몸은 정말 한낱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래서 육신, 고기 육(肉)을 쓰는구나. 마취도 처음 해봤는데, 숨을 크게 들이쉬라고 해서 몇 번 들이쉬었더니, 눈을 뜨자 회복실이었다.
일어나라고 깨워서 일어났는데, 너무 추워서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온풍기로 따뜻한 바람을 이불 밑으로 넣어주자 금세 따뜻해졌다. 다시 병실로 옮기고, 복강경 수술을 했기 때문에 배꼽 주위로 피가 흘렀던 모양. 간호조무사님들이 환자복을 벗기고 깨끗하게 등까지 닦아주셨다. 간호통합병동이라 동생은 내려가고, 퇴원하는 날 다시 오기로 했다. 무통주사를 달아주셨는데, 통증에 둔해서 자주 안 눌렀더니, 간호사가 와서 볼 때마다 "아프면 누르세요." 했다. 몇 번이고 듣고 나서야, 아, 내가 거의 안 눌렀구나, 깨달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걸어다니라고 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가 제일 아팠다. 다음날 수술한 의사가 와서 말했다. 이미 터져있었다고. 난소가 아니라 맹장이었다고. 젤리같은 점액성낭종인데, 6cm가 넘었고. 터진 젤리들을 다 모아서 조직검사를 한다고 했다. 암인지 아닌지는 2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복강경으로 들어갔다가, 난소가 아닌 걸 알고 서둘러 대장항문외과 의사를 불러서 수술을 했단다. 오. 그러고 보니, 수술 닷새 전에 배가 엄청 아픈 적이 있었다. 이상하다, 생각은 하면서도, 아니겠지, 했다. 오른 다리를 들어봐도 아프지가 않아서 맹장은 아니겠거니, 했다. 맹장은 아니었지. 맹장에 낭종이 터진 거니까.
토요일에 동생이 와서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떠나기 전에 동생에게 유서를 써 두었는데, 토요일에야 전해주었다. 혹시라도 죽으면, 집 정리를 할테니, 그때보라고 두고 갔는데, 살아돌아왔으니 직접 건네주었다. 동생은 읽어보더니 훗, 하고 웃고 말았다.
산정특례자가 되어서 6개월에 한 번 CT를 찍고, 대장내시경을 또 하고. 앞으로 4년 더 추적 검사를 한다. 재발율이 높은데, 터져서 더 높아졌단다. 다시 생겼을 때는 암일지, 아닐지, 50:50.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암이 아니었다. 암이라면, 항암을 하고 악착같이 치료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조카 때문이었다. 조카가 크는 걸 보고 싶었다.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어느새 1년.
전원을 한 번 껐다가, 재부팅한 지 1년.
시간 참 빠르다.
1년 사이에 조카는 더 귀여워졌다.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동생과 병실에서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