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많이 읽어도 글쓰기가 늘지 않는 이유
글 잘 쓰고 싶은 사람을 위한 읽기 법을 소개한다.
1편을 읽으면 이 글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1편 링크: https://brunch.co.kr/@prodi/5
1편에서 약속한 예시가 여기 있다. 유명한 사과문인 메르스 창궐 시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과문을 읽어보자. (개인적인 호불호나 견해는 잠시 내려놓고 글에만 집중하자.)
읽어보니 어떤가? 한번 소리 내서 읽어봐도 좋다.
뭔가 느껴지는 문장이 있는가? 밑줄을 쳐보고 이유를 고민해 보자.
(스마트폰으로 읽는 중이라면 한 문장씩 드래그해서 분석해 봐도 좋다)
정교하게 설계한 이 담담한 사과문을 읽으면 차분해진다.
삼성서울병원 의료진이 고생이 많다는 느낌도 든다.
나는 이 사과문을 오십 번도 넘게 읽으면서 한 줄 한 줄 분석했다.
어떻게 설계한 글인지 한 줄씩 분석해 보자
첫 줄부터 보자. 시작하자마자 다른 얘기 없이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어떤 점을 잘못했고(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해),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국민의 고통과 걱정) 구체적으로 짚는다. 그다음 문단에서도 사망자와 감염자, 격리자 각각을 언급하며 사과하고 있다. 모든 잘못을 일일이 사과하며 시작했기 때문에, 사과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기 어렵다.
그다음엔 공감을 표하며 사과가 진심임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때 단순히 ‘공감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아버지를 언급하며 피해자에게 얼마나 공감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가족의 고통을 언급하며 공감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진심이 느껴진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처럼 공감 표현과 함께 책임, 약속, 기대, 신뢰라는 감정의 언어로 사과를 반복하고 있다.
감정의 언어로 사과한 후에는, 이성의 언어로 대응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조사, 환경 개선, 설비 확충, 백신 지원 등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감정적 사과와 이성적 사과를 차례로 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피해자들인 사망자, 감염자, 격리자 각각에게 적용되는 대응책이기 때문에 충분한 대응 방안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분석한 대로, 감성과 이성 두 가지 언어로 사과했다. 감정적으로 분노한 사람도, 이성적으로 불신하는 사람들도 전부 진정시켰다. 비난하는 감정도 누그러졌다.
그다음에는 조심스레 의료진을 거론하며 격려를 부탁한다. 한 달 이상 밤낮없이 헌신 중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측은하다. 왜 그렇게 느껴질까?
첫째, 묘사했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밤낮 없는 헌신이라고 하면 의료진이 얼마나 힘들지 머리에 그려진다. 이러한 묘사의 힘은 위에서 ‘아버님께서도 1년 넘게 병원에 누워 계십니다’라는 문장에서도 보인다.
둘째, 이 문장의 위치 때문이다. 위에서 사과, 공감, 감정적 사과, 이성적 사과를 해서 비난하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이런 얘기를 하니 독자들도 의료진에게 공감할 수 있다. 의료진 격려를 사과문 앞에 두고 읽어보면 잘못을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여기서는 독자의 감정이 누그러진 후에야 지금도 노력 중임을 짧게 내보였다. 그래서 독자는 의료진에게 공감할 수 있고, 어쩌면 의료진과 병원을 응원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짧은 사과문에서 비난을 멈추고 응원까지 유도한 걸 보면 고단수다.
공감 유도 뒤에는 다시 한번 사과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내용이다. 짧은 사과문 안에 공감 표현, 약속, 공감 유도까지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사과문으로 끝낸 덕분에 사과한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글의 주목적에 알맞은 마무리다.
물론 이렇게까지 분석하지 않아도 괜찮다.
글 전체에서 한 두 가지만 잡아냈어도 훌륭하다! 각자 느낌은 다르니 전혀 이상할 것 없다.
그저 읽으면서 어떤 부분이 좋고 나쁜지, 왜 그런 것 같은지 고민하다 보면 점차 자세히 분석할 수 있다.
이처럼 글이 느낌을 어떻게 주는지 고민해 보자. 한 줄 한 줄 비판적 읽기를 연습해 보자.
한 줄 한 줄 분석해 보면, 내 글을 읽고 독자가 어떻게 느낄지도 판단할 수 있다.
이 이야기로 관심을 끌 수 있을지,
이 근거들로 설득할 수 있을지,
이 비유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다.
판단할 수 있으면 쓰는 건 일도 아니다.
매출이 오르는 홍보글, 채용되는 지원서, 용서받는 사과문, 몰입되는 이야기를 쓸 수 있다.
그러니 읽고, 질문하고, 답해보자.
다음 글에서는 잘 쓰는 방법은 다루겠다. 사실, 잘 읽는 방법과 꽤 비슷하다.
알 것 같은가? 팔로우하면 알림 드리겠다.
P.S. 위의 사과문이 정말 흥미로웠다면, 아래 질문들도 함께 고민해 보자.
1. 왜 감성적 사과가 이성적 언어보다 앞에 있을까? 순서가 반대였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2. 두 가지 약속(진료환경 개선과 치료제 개발 지원)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이 약속이 독자에게 와닿는다면 어떤 부분 때문에 그럴까? 왜 약속에 지원 금액이나 확장할 병상 숫자를 제시하지 않았을까? 했다면 글의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3. 글에서 총 3번 사과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사과하는가? 병원이 '잘못'했다고 하는가? 아니면 '잘 못'했다고 하는가? 둘은 어떻게 다른가?
어떤 답이든 좋다. 자신의 답을 찾으신 독자분들의 댓글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