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나는 꽤 오랫동안 이 말로 일해왔다.
처음 창업했을 때 개발 지식이 거의 없었다. 패션 이커머스 플랫폼을 만들면서 개발팀에게 비즈니스를 설명하고, "이런 기능 만들어줘"를 반복했다. 돌아오는 건 항상 질문이었다. "이 경우엔 어떻게 하죠?" "이 기준이 날짜 기준이에요, 결제 기준이에요?" "이거랑 저거 같은 건가요, 다른 건가요?"
기획을 꽤 신경 써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개발자 손에 들어가면 구멍이 줄줄이 나왔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붙잡고 물었다. 한번은 "대표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PO로 일할 때도 비슷했다. 솔직히 가끔 답답했다. 비즈니스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맥락상 당연한 것들도 있었으니까. 일부 개발자들이 좀 근시안적이라고 느낀 적도 있었다. 큰 그림은 안 보고 디테일에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비즈니스 맥락이 먼저고, 디테일은 그 안에서 풀리는 거라는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다.
PO로 일하기 전부터 AI는 쓰고 있었다. GPT 3.5 시절부터 맥락을 꽤 공들여 전달했고, 여러 방법을 시행착오 거치면서 나름 유용하게 써왔다. 두 번째 창업을 하면서 AI와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AI한테도 "해줘"를 했다. 맥락 주고, "이거 분석해줘", "이거 정리해줘", "이거 만들어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AI는 안 캐물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도 좋아"라고 꼬박꼬박 써줘도 잘 안 물었다. 그냥 내가 준 대로 해석해서 결과를 내놨다. 처음엔 편했다. 끊기지 않고 쭉 진행되니까.
그런데 결과물을 보면 미묘하게 어긋나 있을 때가 있었다. 틀린 건 아닌데, 의도한 것도 아닌. 왜 이렇게 됐나 돌아보면, 내가 당연하다고 넘긴 부분에서 갈린 거였다. 날짜 기준 하나, 조건 하나, 범위 하나. 그 작은 차이가 결과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보내버렸다.
그때 떠올랐다. 예전에 개발자들이 했던 질문들.
그 질문을 거쳐야 결과물이 의도대로 나온다. 맥락상 당연한 것도, 실제로 만들려면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그걸 확인하려고 물었던 거다.
AI는 그 질문을 안 해줬다. 그래서 오히려 그 질문의 값어치를 알게 됐다.
당시의 나도, 개발자들도 틀리진 않았다. 비즈니스의 큰 그림과 로직의 정밀함, 둘 다 필요한 거였다. 다만 그때는 서로 다른 쪽에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해줘" 한마디로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 전에 맞춰야 할 것들이 있었다. 뭘 원하는지, 어디까지가 범위인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개발자들이 캐물었던 게 정확히 그거였고, AI와 일하면서 그걸 몸으로 느꼈다.
나름 의미 있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요즘 AI는 둘 다 잘한다.
비즈니스 맥락도 읽고, 로직의 정밀함도 갖추고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이나 미처 생각 못한 디테일까지 먼저 짚어준다. 요즘은 알아서 캐묻기까지 한다.
이런 젠장. 어떤 깨달음을 얻든 결국 기승전AI다. 그러면 인간은 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