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했던 수습기간이 지나고

일이 없던 파업둥이의 수습기간

by 서성우

기다리다가 지친다 - 파업둥이 수습사원

참 고단했던 수습기간이었다. 입사하자마자 시작된 파업으로 수습기간은 무한정 대기 시간이었다. 파업은 11월 27일에 끝났고 얼마 지나 수습기간도 끝났다. 파업의 시작과 끝을 수습기간과 함께 했다. 나에게 수습기간은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기다림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수습기간을 통해 알게 됐다. 기차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다는 개 '하치'가 참으로 대단하게 느꼈다.


입사 다음 날부터 파업이 시작됐다. 금요일에 첫 출근을 했는데 주말을 보내고 오니 월요일에 사무실에 사람이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새로운 조직에 적응을 하려면 선배들과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데 선배들이 모두 사라졌다. 파업 전사로 변한 선배들은 매일 아침 피케팅을 하며 갓 입사한 후배를 맞아줬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파업에 동참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며 파업 현장을 지나갔다. 회사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모든 게 낯선 수습사원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입사 시험 볼 때 회사가 파업 상황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입사 이틀 차에 맞닥뜨린 파업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사무실에는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선배들이 남아있었다. 부서장은 노조에 가입할 수 없어 파업을 할 수 없었고 퇴직이 한 달 남은 말년 국장님들 몇 명이 있었다. 우선 1주일 동안은 ojt시간이었다. 유치원생처럼 경영국장님을 따라 회사를 돌아다녔다. 부서마다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회사는 어떤 사업을 하는지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파업.jpg 파업의 풍경


ojt가 끝나고 동기들은 각자 부서로 배치됐다. 기자는 보도부로 아나운서는 편성제작부 아나운서팀으로 피디인 나는 편성제작센터 제작부서로 갔다. 각자의 사무실로 찢어진 우리는 수습기간부터 부서장 단독 멘토링에 도입했다. 선배가 아무도 없었기에 부서장과 일대일 맞춤식 교육이 들어간 것이다.


보도국장님은 기자 동기를 바로 현업에 투입시켰다. 경찰서와 소방서, 시청 등 주요 공공기관을 찾아가 소개해줬다. 사건사고가 핵심인 지역 방송국에서 파업으로 끊긴 연락망을 동기 기자에게 바로 맡긴 것이다. 취재하고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전형적인 수습기자의 삶이 시작됐다. 아나운서 동기 역시 바로 방송을 맡았다. 반드시 방송해야 할 시간별 라디오 뉴스와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 TV 지역 매거진 프로그램에 투입됐다. 이전에 방송을 했던 경력이 도움이 됐다. 별다른 교육 없이 일을 시작했다.


수습기간.jpg 할 일 없이 앉아있던 책상


안타깝게도! 나는 할 일이 없었다. TV 프로그램 제작이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 나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작부장님도 딱히 할 일을 주지 않았다. 대신 워낙 말이 많은 캐릭터라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지역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정말 힘들었다. 졸리기도 졸리고 나중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인식이 안 되는 지경에 이렀다. 딱히 시킬 일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촬영 현장은 갈 일이 없었고 편집할 영상도 없었다. 물론 기존에 촬영했던 것을 혼자 편집해볼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방송 시간이 다가올수록 편집을 열심히 달린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 조금 쫄려야 하는 법이다.


하릴없는 일과 시간

점심에는 곧 퇴직을 하는 국장님들이랑 낮술을 자주 했다. 순댓국을 먹으면 소주 각 일 병은 기본이었다. 한 번은 순천에 갈 일이 있어 국장님 차를 타고 갔다. 오전에 잠깐 장소 답사를 하고 점심부터 염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두 명이서 소주 6병을 마셨다. 점심부터 얼근하게 취해서 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이미 하루 일과는 무의미해졌다. 수습사원이 말년병장처럼 짱 박힐 곳을 찾는 지경이 됐다. 텅 비어있는 편집실에 가서 눈을 감았다. 점심에 낮술을 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있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국장님들과 술 상대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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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4시가 왔다. 시간이 잘 안 가는 구간이다. 할 일이 없으니까 시간을 자주 확인했다. 4시, 5시, 6시, 가방을 쌀 준비를 하며 상석에 있는 국장님 동태를 살폈다. 6시가 되자마자 가는 건 아무래도 수습사원이 개념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에 6시 17분이 적당했다. 적당히 자리에서 일어나 국장님 쪽으로 향했다. 내가 아직 안 가고 있었다는 걸 알리려는 듯 인기척을 내고 시야에서 얼쩡거렸다. 그렇게 국장님한테 인사를 하고 퇴근을 했다. 그렇게 퇴근하니까 개운하지 않았다. 일을 했다는 느낌보다 열심히 눈치 보다 도망 나온 듯했다. 집에 와서 쉬는 것도 찝찝했다. 내일도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게 뻔했으니까.


동기들과의 비교

나 빼고 다 바빴다. 아나운서 동기는 파업으로 생긴 방송 공백을 매웠다. 기자 동기는 '마와리'도느라 잠도 부족했다. 새벽에 일어나고 2시간마다 사건 보고를 해야 했다. 오히려 일하는 동기들이 부러웠다. 나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고 내 존재를 찾고 싶었다. 회사에도 일로 인정받고도 싶었다. 처음에는 다들 회사에 잘 보이고 싶어서 경쟁한다. 시간이 갈수록 어떻게든 안보이려고 노력하겠지만.


20170918_193313.jpg 방송 녹음 중인 기자 동기


동기들과의 비교는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역 사회를 열심히 누비는 동기들을 보고 있으면 괜한 피해의식이 생겼다. 지역 방송사에서 피디의 존재는 기자나 아나운서보다 못한 것인가. 그런 생각들이 회사에서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동기가 장난으로 하는 말에도 웃어 넘기기 어려웠다. 말로라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부딪히고 싸우기도 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직업적 중심을 가진 동기들을 볼 때 피해의식을 느낀 결과였다. 정신없이 바빴다면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나아갔을 것이다. 그게 동기애라고 불리는 것이다. 군대의 훈련병처럼 같이 고생하는 환경에서 나오는 동기애는 서로를 더 끈끈하게 만든다. 아무 일이 없던 수습기간은 동기애가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들었다.



일이 주는 정체성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도 할 일을 주지 않지만 이럴 때 일 수록 스스로 목적을 찾아가 보자. 누군가 주는 것을 기다리지 말자. 할 일은 내가 찾아서 하는 것이다.' 피디가 된 이유를 다시금 생각하면서 스스로 할 일을 해보기로 다짐을 했다.


다음 날이 되면 마음이 또 흔들렸다. '젠장 나 혼자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시간 아까워 죽겠네. 밥 먹으면 왜 졸린 거야 한 것도 없는데. 젠장!' 피디를 준비하며 공부했던 루틴들이 있다. 아침에 신문을 읽고 글을 쓰고 프로그램 기획안을 썼다. 지금 피디가 됐는데도 비슷한 일상을 보냈다. 신문을 보고 글을 쓰고 프로그램 모니터링을 했다.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고 싶었지만 피디 준비하던 시기에서 이름만 피디로 바뀌었을 뿐이지 스스로 뭘 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20171026_180836_HDR.jpg 현타가 오는 퇴근길 풍경


삶의 중심이 사라졌다. 학생은 공부하고 직장인은 일하고 피디는 촬영하고 편집해야 한다. 일이 없으니 정체성이 희미해졌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존재를 세운다. 멀고 먼 여수로 온 것도 오로지 피디라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수에 왔는데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먼 곳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마음이 흔들렸다. 고단한 타향살이를 지켜줄 중심이 없었다.


취미생활도 해봤다. 평소 배우고 싶었던 재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재미가 없었다. 곁가지만으로 인생을 채울 수가 없었다. 취미도 본업이 제대로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 취미 부자인 백수가 드물듯이 우선 본업을 갖는 게 필요했다.


20171027_205158.jpg 떳따떳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가장 강력한 고문은 아무것도 할 일을 안 주는 것이다. 두산에서 직원을 해고하려고 책상을 벽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한 일이 있었다. 그분이 구제신청을 해서 다시 복귀가 됐다. 정말로 잔인한 해고 방법이다. 사무실에서 하는 일 없이 눈치만 보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 분은 부당함에 문제라도 제기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파업 상황에 수습사원으로 들어온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수습기간이 끝나고 파업도 끝났다. 드디어 고대하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그런데 왠 걸. 파업이 끝나자마자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나 역시 열렬한 파업 전사가 되어 피케팅에 동참했다. 공영방송 언론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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