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경주에 아직도..!
이제 걷는 게 익숙해졌는지 핸드폰을 하면서 걷네요.
물론 평평한 길에서만 가능합니다.
길이 구불구불하거나 높낮이가 다양하면 위험하죠.
가장 많이 보는 것은 역시 여기서도 유튜브.
과거 핸드폰도 없던 시절 순례자들은 무얼 하며 걸었을까요?
배가 고파진 우리는 노란 화살표 따위는 보지 않고 'BAR JACOBEO'표시를 따라왔습니다.
밖에서 봤을 때 너무 어두워서 닫은 줄 알고 "제발, 제발"을 외치고 있는데
문을 열어준 사람은 오전에 길에서 만난 '마이크'입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온 마이크는 우리네 아버지 나이대지만 저보다 훨씬 빨리 걸어요.
1979년, 자신이 6살 때 부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미군부대에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갔는데 저와 같은 경험이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당시 경주에 갔었는데 돌로 된 첨성대 모형을 샀다고 합니다.
40년 전 추억과 연결시켜 준 작은 돌이 '기념품'의 참 역할을 했네요.
바에서 함께 맥주를 한 잔 하고 마이크는 먼저 떠났습니다.
어른이 떠나고 남겨진 우리는 도박에 빠졌습니다.
한 판에 0.2유로인 슬롯머신에 무려 1유로를 전부 잃은 우리는
다시는 도박판에 빠지지 않겠다며 길가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우리는 '그라뇬'에 도착했습니다.
교회수련회 재질 마루를 우리가 독차지했는데 황토방 느낌이 나서
바닥을 뜨끈하게 지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장작을 넣어 태우는 벽난로는 불편하지만 감성 있는 '현대의 부정'을 느끼게 합니다.
이곳 그라뇬의 알베르게는 성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숙박비를 받지 않고 기부금을 내면 된답니다.
공짜로 잘 수 있다는 뜻인데 저녁과 아침 식사도 줍니다.
식사도 대충이 아니라, 샐러드와 토마토 파스타 그리고 와인은 무한입니다.
대신 순례자들을 관리하고 있는 '테레사'와 '호세마리아'의 식사준비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식사를 마치면 '저녁 기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없지만 우리 3명 만을 위한 기도를 해준다고 하여 참여했습니다.
넓은 기도실의 불을 끄고 커다란 십자가가 보이는 곳만 빛이 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각자의 하루를 정리하는 말을 각자의 언어로 담았습니다.
"순례길에서 길을 잃으면 작은 노란 화살표만 찾아 따라가면 됩니다.
앞으로 인생에서도 노란 화살표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순례길을 다 걸으면 이런 의미를 담은 '노란 화살표' 타투를 새기겠다고 생각했으나
안 하길 잘했다..
이곳에서 만난 마우리시우는 스위스 사람입니다.
몰랐는데 스위스는 세 나라로 둘러싸여 있는데
고유의 언어보다는 지역별로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쓴다고 합니다.
한국어로 "안녕"을 말해주는 정도도 어찌나 고맙던지,
숲 연구가 마우리시우는 요즘 일본 만화를 잘 안 보고 한국 웹툰을 본다고 합니다.
한국에 방문한다면 꼭 제주도를 가보라고 했는데
물론 술을 많이 마시라고 조언해 줬습니다.
이런 게 국뽕이 차오른다는 느낌이겠죠.
생각해 보면 세상은 넓고 우리가 모르는 문화가 많은데
우리는 왜 다 아는 척 살고 있을까요?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는 상상도 못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하는 이유죠.
다음 날 마우리시우와 같이 걸었습니다.
물집이 아파와 길에 주저앉아 양발을 벗어보니 피고름이 차 있었어요.
별로 개의치 않고 가방에서 실과 바늘 그리고 어느 식당에서 훔쳤는지 모를 냅킨을 꺼냅니다.
몸을 고치느라 다른 친구들을 먼저 보냈지만 조금만 앞으로 가면 카페가 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마우리시우와 석현.
발 통증을 없애기 위해 나는 맥주를 시켰습니다.
나의 낮맥에 대한 정당성은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예보에서는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산 속이라 그런지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쏟아지진 않지만 가방에 노트북이 있어서 우비를 입기로 했습니다.
노트북 파우치에 비닐을 씌우고 배낭 커버, 우비까지 입었는데 가랑비 수준?
그래요 저는 걱정인형이에요.
길에 식당이 없습니다.
배가 고파진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였습니다.
가방의 식량을 살펴보다가 '신라면'을 발견했네요.
난폭해진 한국인이 민족의 비상식량을 부숴버립니다.
가방에 있던 눅눅한 고다치즈를 올려 먹으니 김밥 O국에서 500원
추가한 치즈라면 맛이 나네요.
근데 수출용이 원래 더 매운 가요? 저는 맵부심 있는데 추워서 그런지 콧물이 멈추지 않네요.
오늘의 목적지 '아타푸에르카'에 도착했습니다.
길에서 딱딱한 라면맛을 봐서인지 끓인 라면이 끌렸습니다.
간이 슈퍼에서 동남아 라면을 사서 면만 끓이고
한국에서 공수해 온 라면차(티?)를 부었습니다.
이거 왜 오짬맛이 나죠?
그렇게 스페인에서 한국인의 밤이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