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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퇴준생 Oct 02. 2023

30대 퇴사 후 800km 걷고 눈물을 펑펑 흘린 남자

산티아고 순례길 완결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날입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페드로조에서 05:25에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일찍부터 준비한 이유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12시에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를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아니지만 순례자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약 30일 동안 800km에 가까운 길을 함께 걸은 살로몬 X-wing. 튼튼하고 이뻤는데 메쉬에 구멍이 나서 작별했습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다음 트레킹을 위해 새로운 신발을 구입할 예정인데 살로몬 제품을 다시 사고 싶네요.

마지막 날이라고 하늘도 우나 봅니다. 순례 기간 동안 한 번도 폭우를 만난 적은 없는데 이 날은 온몸이 다 젖을 정도의 비가 쏟아졌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비의 무게를 줄이지 못한 순례자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중간에 만났으면 힘들었을 날씨를 끝나는 날 만나니 이것 또한 즐겁습니다. 모든 것이 긍정적이었던 하루입니다.

비에 홀딱 젖기도 했고 배도 고픈데 식당이 없습니다. 임시로 밖에 나와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때까지 아껴두었던 봉지라면과 캔김치(중국맛), 라면 수프로 배를 때웁니다. 언제 끓여 먹을지 몰랐는데 역시 한국인들에게 최고의 비상식량입니다. 

음식을 담았던 지퍼락에 발을 담습니다(?). 비 때문에 양말이 다 젖고 있어서 갑자기 떠올린 방법입니다. 실제로 비를 막아주었고 이 장면을 인스타그램 릴스로 공유했더니 6만 명에게 공감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여름에도 헌터부츠 안 사도 되겠네요.

미친 날씨에도 즐거운 기록을 이어가는 에리카와 나.

이제 마지막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근데 이 표시를 보고도 1시간을 더 걸으니 아쉬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를 청춘의 시간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딱 봐도 순례자들은 복장에서 티가 나죠? 우산을 쓸 이유가 없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비수기의 “부엔 까미노”는 “안녕 미친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겨울에는 순례자가 적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설명을 듣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미친 사람인가요?

산티아고 대성당 건너편에는 산마르티노 수도원이 있습니다. 이곳은 카탈루냐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인데 순례자들이 지낼 수 있는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설도 좋고 할인을 받아 들어갈 수 있어서 경쟁이 치열합니다. 전화나 부킹닷컴으로 미리 예약하고 방문하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터널만 지나면 지금까지 발에 물입이 잡히고 어깨와 허리가 뭉치면서 걸어온 목적지가 보입니다. 저는 어떤 큰 번뇌를 깨우치고자 이 길을 걸었을까요? 기대한 만큼 번뜩이는 변화를 느끼진 못했지만 이 길을 ‘함께’ 걸은 사람들을 얻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가치였습니다.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도착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는데 도착하면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산티아고 대성당을 봤을 때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감정적이지 않구나 느끼려는 순간 옆에서 걸었던 ‘이샤’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렇게 입꼬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눈에서 빗물이 흘렀습니다. 마침 도착 장면을 영상으로 담고 있어서 이 못생긴 얼굴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표정이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힘을 이기지 못해 찌그러지고 있었는데 눈은 웃고 있었어요. 왜 울었나 생각해 보면 수많은 감정의 복합체가 표현된 것 같습니다. 힘들었던 기뻤던 재밌던 화났던 순간들이 모두 융합되어 하나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순례자를 위한 마지막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였지만 위로받는 느낌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한국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미디어의 영향일 수도 있고 퇴사 후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매우 많죠. 그래서 마지막 식사는 한식당에서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쌈을 싸 먹고 손가락 하트를 열심히 배우는 친구들이 고마웠습니다.

소주까지 얼큰하게 마시니 찐친이 되어버렸네요. 외국 친구들을 만나면 으레 “우리나라 놀러 와!”라고 말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번 겨울에 진짜 놀러 갑니다. 네덜란드에서 이샤, 오스트리아 빈에서 알딧을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먼저 물어봤는데 흔쾌히 승인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이 길을 걸으며 다양한 친구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의만 차리는 사람들이 아닌 진짜 친구!

지금까지 저와 함께 걸어준 사람들 그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구독자분들께 큰 감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많이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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