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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Jul 28. 2023

스스로 재해석한 세상에서

부족함을 볼 수 있는 안목은 축복이다.


관점

무엇을 본다는 것은

자신만의 프레임을 통해 들어온 세상이다.


그것이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감각적이든

의식적이든

언어적이든

자신만의 정보에 의해 해석된 의미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그가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구현하는

또 다른 자기만의 세상이다.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그건 그가 가진 지적 한계에 갇힌 세상이다.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같은 것을 다르게도

다른 것을 같게도

맞는 것을 틀리게도

옳은 것을 그르게도

그른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도 해석한다.


모든 갈등과 문제

고민과 스트레스

상처와 오해

비난과 원수를 만드는 것은

같은 것을 보고 다른 해석을 하는 것보다

같은 것을 보고 틀린 해석을 하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르다는 것은 너를 인정하지만

틀리다는 것은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곧 다름은 공존할 수 있지만

틀림은 공존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인간은 아니라고 우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인간하고는

진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 관계가 친구이건

연인이건

부부건

동료이건 그건 오래갈 수 없다.

맨날 속고 속이는 관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 관계가 부모 자식 관계일 때

그 관계는 고통의 연속이다.


거짓말은 이기적 욕망으로 태동한다.

자기 것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은

엔젠가는 그 욕망이 가족을 삼키고

자기도 삼키면서 저주로 끝난다.

그 저주에는 비교와 무시, 시기와 질투

사기와 음모, 폭력과 살인이 뒤따른다.


무지한 그들은 그 끝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무슨 길을 택했는지 깨닫고 후회한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까지 잃었다.


무지한 자들은 코앞의 것에 금방 유혹되지만

삶의 관점이 깊고 높으며 멀리 바라보는 사람은

거짓이나 욕망 같은 얕음에 흔들림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허하며 부질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의 삶이 공허하고 외로운 이유는

평소 그런 허함을 쫓고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의미와 가치로 채우는 사람은

공허하거나 외롭지 않다.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니라"

덕(德)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그냥 이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가장 아끼는 이웃이 주변에 많으니

행복하고 기쁨이 넘친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보고 듣고 수용된 지식들이

다양한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것으로 재해석되고

그렇게 해석된 인지 영역의 지식을

공감과 체험 영역의 지혜로 넘어올 때만이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의 사람이 된다.


자기 멋대로 살 때는 모른다.

자기만이 옳은 줄 착각한다.

삶이 그런 무도함과 비상식,

불의와 불법이 난무하도록 살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찰나다.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면

뼛속으로 스며드는 고통의 시간만 남는다.


그걸 누가 알아서 알려주겠는가?

삶이 그렇게 썩었고 무도한데.

그들의 주변에는 향기로운 사람은 모두 떠나고

썩은 내만 진동하는 인간으로 들끓는다.


인생이라는 길은 그렇게 짧지 않으며

세대를 이어 자식에서 자식으로 남겨진다.


당신은 찰나를 위해 저주를 선택하려는가?

아니면 공허와 외로움이 사라진

긴 인생의 여정을 평온함과 여유로움으로 채우겠는가?


행복이나 불행은 결국

무엇 또는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윤 정 현



부족함을 볼 수 있는 안목은 축복이다.

인정할 줄 앎은 채움을 낳지만 무시는 비열함만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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