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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Aug 19. 2023

삶의 주인과 하인

자아실현의 욕구


자녀의 주도적 감상평


"몇십 년 전 길게는 이것처럼 100년 전 일을 기념하는 거?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못할 것 같은데 아빠나 아빠 지인들은 매년 하잖아?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어떤 자녀가 '조선인 관동대지진 피해자들을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기념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용돈 받기 위해서 역사 강좌에 참석하였던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자기 주체적이며, 주도적인 감상평을  내놓은 것에 아빠가 감동하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들의 교육이나 학습은 대부분 부모나 선생 또는 사회로부터 주입된 지식이기에 자신의 견해나 관점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대부분 기억된 지식이다. 이는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기술적, 재능적 삶에는 도움이 되지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선택하는 문제와 갈등의 순간에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직업이나 기술적, 재능적 성공에는 탁월하지만, 사회성을 기르고, 인간관계를 좋게 하면서 좋은 친구를 사귀는 문제, 연애와 결혼의 순간 그리고 결혼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문제와 갈등의 순간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올바르고 좋은지 그것에 대한 경험이나 자기 주도적인 선택, 토론, 관점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장애와 선택장애 그리고 마마보이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결정장애, 선택장애와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거기에는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개진해 볼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어떻게 선택하겠는가? 스스로 그 선택으로 인한 결괏값이 없었는데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잠시 생각을 깊게 하기 위해 선택이 더디든지, 오래 하는 것 또는 잠깐 유보하는 것은 결정장애나 선택장애가 아니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 고심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다. 순간적 판단으로 커다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인류사의 중대한 결정이라면 쉽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단순한 문제에서도 항상 선택하지 못하거나 당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헬리콥터맘이나 잔디깎기맘처럼 부모의 과잉보호가 그렇게 만든다. 마마보이 또는 마마걸은 어려서부터 이런 자기 주도적 생각이나 자기 주도적 선택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지 못하도록 하는 환경에서 자라난다.


헬리콥터맘은 자녀들이 생각해 보거나 선택의 결과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을 부모들이 아이들 주위를 빙빙 돌면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가장 빠르고 좋은지 미리 선택해 준다.


잔디깎기맘은 아이들이 걸아가야 할 앞길에 어려움과 문제가 될 장애를 미리미리 제거함으로 평탄 도로를 깔아주는 것이다. 아이는 항상 어려움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문제만 생기면 엄마에게 일러바치고, 해결을 부탁하고, 도움을 받아 쉽게 해결한다. 언제든지 119만 부르면 도움을 쉽게 받는 것처럼 자녀 앞에는 항상 해결사가 있었다.


이러한 자녀는 초기에 남들보다 빠르고 쉽게 앞서가면서 잘 나가는 아이로 보이지만 성인이 되어 자기 삶을 살아야 하는 순간에도 의존적이 된다. 스스로는 문제를 해결해 본 적이 없다. 직장에서나 결혼 생활에서 문제가 생기면 엄마를 호출한다. 부부싸움에도 엄마를 호출하고, 엄마는 또 끼어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이렇게 성장한 마미보이, 마마걸들은 성인이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 그들 부모로 인해 그들의 자식과 그 후대까지 고통받는 인생으로 만든 것이다.


자녀들은 자기 주도적인 의식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에 부딪히면서 나아가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다.



관점의 주체적 표현


위의 기사에서 아버지는 자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대견해한 것이다.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의식적 선택을 하고, 자기의 의견과 느낌, 표현을 하는 선택적 삶을 살아가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이일 때는 그런 선택을 스스로 해낼 수 없다. 그러기에 아이에게 좋은 방향을 이끌어줄 수 있도록 좋은 환경과 장소, 책과 강의, 문화활동이나 체험들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그것이 선물이나 용돈, 책망을 동반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이르도록 그런 식, 곧 선물이나 용돈으로 교육시킬 수는 없다. 자기 스스로 더 나은 의식적 선택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아 정체성은 형성되고, 올바른 가치관과 삶의 철학을 형성하여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닦게 된다. 가끔 부모는 저렇게 아이의 의견이나 느낌, 후기에 대해 살짝 질문해 보는 것도 좋다. 그래야 마음으로만 잠재되어 있던 의식적 관점들이 현재 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부모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자식 싸움에 부모가 싸우고, 자녀의 이권을 위해 학교에 권력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어리석은 부모들이 있다. 자녀의 취업이나 진로, 성공을 위해 온갖 청탁을 하며 발로 뛰는 것은 결국 아이를 인생이라는 스스로의 긴 여정에서 자멸하게 만든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아상실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독일 고등학생의 의식 수준


얼마 전 한국에서 진행된 2023 세계잼버리대회에서 독일 학생들이 사찰 경험을 했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타종행사에 모든 아이들로 하여금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타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한국의 현대적인 문화만 알았던 학생들에게 정신적 문화와 오래된 가치를 듣고, 인생의 수많은 철학적인 질문에 깊은 답변을 들으면서 감동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감동한 학생들이 직접 스님이 되는 체험을 하겠다며 삭발하는 행사를 가지려고 했다. 한국에서는 부모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독일 학생들은 오히려 그것이 더 의아해했다. 그곳에서는 선생님들이 부모에게 의견을 물어도 자녀에게 직접 이야기하라고 할 정도로 부모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 그리고 결국 7명의 남녀 학생들이 삭발을 진행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환경이나 문화, 사회 시스템이다.



재해석을 통한 삶의 기준점


자기 주도적이라 하여 거만하거나 교만한 고집이나 아집을 부리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평소에 자기 논리를 펼치는 토론이나 대화를 통해 서로 합리적으로 존중하면서도 올바르고, 더 나은 방향의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협의, 협력, 조율, 타협, 논의, 주장과 수용 등 존중과 상생을 배워나가는 차원이다.


겸손하지만 자기주장이 있어야 하며, 비판적이지만 비난하지는 말아야 하며, 비판도 자신만의 대안이나 제안할 수 있는 방향성이 없다면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일 때 양보하거나 조율, 협력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의식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 삶에 대하여 진정한 책임을 지는 자세다.


그리고 무엇을 보았거나 들었으면 자기만의 재해석 또는 감상평을 말하거나 기록하려는 표현의 자세다. 저 아이처럼 자신이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고, 존경함으로 자신의 관점이 정립된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고, 선택하는데 하나의 개념이 되면서 기준점이 된다.


어떤 기준점이냐면,

그들은 역사의 아픔을 살아간 선조들을 위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더 나아가 기념함으로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마음이다. 그것은 자신과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이며, 훌륭한 역사의식이며, 또한 본받고 싶은 존경스러운 일이다. 비록 다 실천할 수는 없지만 그분들의 모본을 따라 자신 또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겨있다. 이로서 스스로 의식적 개념을 정립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그에 걸맞은 선택을 하게 되고, 자신의 배우자나 친구들 또한 그런 의식과 걸맞은 선택을 할 것이며, 후에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그런 교육적 관점의 삶으로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과 하인의 삶


이러한 자세가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세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선택한 일에 대하여 실수하거나 손해를 보았더라도 자책하거나 죄책감을 갖지 않으며, 잘못한 일이나 선택에 대하여는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하는 자세가 책임 있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삶으로 살아갈 때 실수나 실패를 해도 그것이 더 나은 성공으로 향한 실패의 상수값을 하나 제거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하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편한 것 같지만 피곤하다.


인생에서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엄마를 호출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매번 감정은 상하고,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결국 인생의 종지부를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시키는 것만 하는 하인처럼 자기 생각도, 자기 주관도, 자기 의지도, 자기 삶도 없다.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고 부모가 살라고 하니 숨을 쉬고 살아내는 시체다. 인형이나 로봇처럼 자기 생각이나 의식이 없이 살아가는데 인생에서 무슨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인정의 욕구와 존경의 욕구


집착이나 타인에게 강하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도 하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다. 메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에서 보듯 인정의 욕구는 집단이나 소속감의 욕구로서 자신이 소속된 곳으로부터 지지와 인정을 받고 싶은 심리다.


인정의 욕구는 3번째 단계로 4번째 단계인 존경받는 삶을 살아갈 때 저절로 벗어난다. 자신의 삶을 타인이 존경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면 굳이 누가 알아주기를 목말라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경의 욕구도 고차원이지만 어떻게 보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 중 하나다. 존경받는 삶을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내적 심리가 깔려 있다. 그 단계까지 넘어설 때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는 완성된다.



인정해 주는 삶 ; 자아실현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이는 이타적인 삶을 이기적인 삶으로 완성한 상태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고, 타인과 공존하면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억지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심이나 조건 없이 그리고 의무감이나 죄책감이 아닌 즐김의 상태로 하는 것이다.


그 자체의 삶이 자신에게 가장 이롭고, 행복하기 때문에 하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이기적이면서 가장 이타적인 삶으로 완성되는 상태다. 이 상태가 되면 누가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또는 누가 보고 있거나 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 행동의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이로우면서 행복하기 때문에 하지 않거나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든 그 선을 잠시 멈추든 그 자체가 자신과 타인에게 가장 이로운 삶을 구현할 때 자아실현은 완성된다. 그것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진정한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상태다.


누구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상태는 하수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서 존경받는 삶을 사는 사람은 중수다.

타인의 미세한 강점의 삶을 찾아 진정으로 인정해 주는 삶, 그것이 상수다.


내가 초점이 아닌 네가 초점이 되는 안목

내가 주인공이 아닌 네가 주인공이 되는 언어

그것이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 높은 상태로 이루어 내는 행동

그것이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여러분이 그들의 삶을 인정해 주는 삶으로 살아야 한다. 그들에게 보이는 작은 장점이나 강점을 관찰의 눈으로 찾아내어 센스 만점으로 표현해 주는 것, 그것이 하인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시작점이다.


우리 모두가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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