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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Nov 13. 2023

나, 두 개의 존재

사랑은 항상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다


[자아의 형성 ; 내면의 울림을 향한 저항]


인간은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볼 때 근본적으로 누구나 외롭고, 고독하며, 삶이 공허하다. 왜냐하면 참 존재인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만들어진 존재인 자아의 형상을 쫓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지적 체계인 지식을 토대로 생각과 감정이 탄생되며, 그것의 총체인 자아가 형성된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는 사춘기의 저항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아적 존재를 인식하려고 한다.

그 인식의 잣대가 그동안 축적한 언어들, 곧 지적 정보들을 토대로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 정의들의 총합이 정체성 형성이며, 자아라는 인식의 잣대가 된다.

'나'를 인식하는 자아는 이렇게 형성된다. 실체도 아니요 본체도 아니며 스스로 만든 또는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형상이다. 실체가 아니기에 공허하고, 외로운 것이다.


실체는 외롭지 않으며, 공허하지 않고, 삶에 향기로운 의미를 발한다. 인간으로서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 명료하게 인지하기 때문이다.

괴테가 증명한 대로, '스스로를 신뢰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된다'는 말과 상통하기에 그렇다.



[내면의 소리 ; 아니라는 저항]


당신의 길이 옳지 않다면 내면은 끊임없는 저항의 신호를 보낸다. 그 저항이 스스로 멈추기까지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 저항은 공허요 공허는 영혼의 배고픔이다. 진정한 사랑이 채워지면 그 공허는 멈춘다.


지독한 외로움, 삶의 무의미, 홀로 버려진 느낌, 행복과 무관한 삶,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허무, 무엇을 해도 채울 수 없는 공허,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울감 등 이러한 것들이 영혼의 배고픔이다.


그 배고픔을 채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 답은 이웃 사랑이다.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모든 경전과 성현들이 또 위대한 깨달음의 철학 서적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그런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적용하고 구현 가능한지, 자신의 위치에서 어떻게 작은 발걸음을 뗄 수 있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주는 자도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이 모르거나 살짝 알아도 그 무게감에 포기한다.


내면의 소리는 본래의 존재인 의식, 곧 참나가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자아에게 올바른 길을 찾도록, 느낌을 통해 알아차리도록 보내는 시그널이다. 자아적 존재와 그 존재적 차원이 다르기에 느낌은 의식이 유일하게 보내줄 수 있는 감각적 통로이며, 수호천사와 같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이 감각적 느낌을 수용한다. 인지는 그다음 단계이며, 그것을 사고와 언어의 차원으로 인식하는 단계는 그다음 단계들이다.

여기에 감정과 생각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감정의 작용]


아, 기분이 너무 좋다.

오늘은 짜증이 올라온다.

슬프고 눈물이 난다.

너무 화가 난다.

우울하다.

외롭다.

미워 미워!

너무너무 사랑해!

보고 싶어!

고마워!

너를 만나고부터 나는 너무 행복해!


이는 감정의 작용이요

자아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묘사한 현상이다.

느끼는 상태는 감정이요 그 상태의 유무를 판단하고, 인식하고, 언어화시키는 것은 생각의 작용이다.

짜증은 감정이지만, 그것이 올라온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작용은 생각이다.


감정은 오감의 감각, 곧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느낌이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한다 또는 기분 나쁘게 한다고 그 상태를 감지하는 센서다.

육감도 여섯 번째 감정에 포함된다. 내면적으로는 다르지만 육감, 촉, 직감, 영감 같은 작용을 통칭하여 여섯 번째 감각인 육감이라 한다.

이렇게 오감의 감성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내 감정이 어떠하다고 느끼는 감지 센서일 뿐이기에, 그것이 어떠한 상태인지 인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 분별하는 생각이다.

생각이 지금 내 기분이 어떠하다고 판별해 낸다.


내 기분의 상태를 언어로 명료하게 인지하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그때 상태를 올바르게 인지하여, 그에 타당한 행동화의 패턴을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화가 났는데, 그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이 내게 어떠한 느낌과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하여 나는 어떠한 언어와 행동을 상대에게 표현하였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이는 상대방이 화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알려주는 센서를 통해 어떤 감정인지 느끼고, 그것을 사고의 작용인 이성적, 논리적 생각의 기능을 통해 분별할 때 상대에게 부정적 감정으로 대처하지 않고, 문제 해결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게 된다.


이렇게 상황과 사고의 분리, 곧 감정과 사고의 분리가 일어나게 되면, 쉽게 분노하게 되는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율할 줄 알게 된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 탄력성을 키워 마음의 안녕감을 주므로 평안을 유지하는데 엄청 효과적이다.



[생각의 작용]


자아라는 개념의 첫 번째 인식자요

첫 번째 작용인 감정과 생각은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도록 돕는 첫 번째 존재의 시스템이다.


나는 누구지?

나는 어디서 왔지?

나는 왜 나여야만 하지?

인간이란 도대체 이곳에 뭐 하러 온 거야?

나는 왜 쟤가 싫지? 쟤는 왜 좋지?

이런 생각은 어디서 일어나지?

나는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어? 등등


이러한 것들이 생각이 일어나는 작용들이다.

생각은 감각보다는 논리적 사고에 의해 형성되는 이성적 작용이다. 물론 감각에 의해 얻게 된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감각은 정보를 해석하는 생각의 토대요 근거로만 작용한다. 감각 없이도 생각은 사고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사물을 분별하는 인식과 비교를 하면서 얻어진 지적 정보에 의해 갖게 되는 정체성 작용이요 생각이 일으키는 현상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이러한 개념을 알아차렸으며, 만들어 왔다.



[자아와 참나의 존재인 있음]


하지만 생각과 감정은 작용에 의한 상태이지 존재가 아니다.

상태나 작용은 무엇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존재는 있음이다. 있음이란 이름이 명명되기 전부터 본래 존재했다. 이 존재가 두 번째 존재인 참나다.


현상은 무엇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 작용이나 상태이기에 있다가 사라지며, 사라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마치 바람처럼, 물처럼 흐른다.


존재는 항상 있기에 주시자다. 일어나는 현상을 목격하는 목격자다.


그러므로 현상은 항상 변덕을 부리는 자아요

존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의식이며, 본래의 자신이다. 있음의 존재는 감정이나 생각이 일으키는 현상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심해의 바다처럼 고요하다. 이 존재에게 감정의 흔들림이나 생각의 갈등은 마치 몸에 묻었다가 떨어지는 먼지와 같다. 먼지가 몸에 하등의 피해를 줄 수 없듯 진정한 존재에게는 하등의 때묻음이나 피해를 줄 수 없다. 이것을 의식적으로 몸이 이해하고, 반응하는 차원까지 이르는 것이 깨달음이요 존재의 현현이다.

이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인지하고, 이타애를 몸이 반응하는 단계, 곧 몸에 배어서 체화된 단계로 성숙한 상태를 말한다.


생각과 감정은 의식이 인식을 위한 경험의 도구자들이다. 측정을 할 수 있는 도구들이 있어야 경험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상태를 주시하고 관찰하는 존재로서 본래의 참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각성의 상태, 곧 깨달음을 중시했다.

깨달음의 상태를 기독교는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고 하며, 불교는 해탈이라고 한다.



[알아차림 ; 깨달음의 시작]


그럼 깨달음이 일어나기 전은 무엇인가? 각성이 일어나기 위해 불교에서는 알아차림, 곧 모든 것에 깨어 주시하는 관찰을 요구한다.


기독교에서는 너희는 항상 깨어있으라 다시 말하노니 깨어있으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는 삶의 모든 면을 의식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너희가 개념 없이 실수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와 피해를 입히니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관찰하는 행위가 요구된다.

이것이 능동화다. 그냥 주어진 환경이나 사건, 상태를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보내던 수동화된 삶에서 의식적으로 주변과 사람을 스캔한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취했을 때 그 입에서 나온 말이나 행동, 곧 결과론적으로 나온 것들에 대해 반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행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나왔으며, 의도와 동기를 이해하는 단계를 위해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상대의 잘못 보다 나의 잘못된 언행에 의해 그러한 결과들이 도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의도로 그 말을 한 것인데,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여 불화를 증폭시키는 결과로 치달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찰의 과정을 거치니 문제와 갈등은 줄어들고, 여유와 해결의 방법론이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의 확장이다.

이러한 관념의 확장은 전혀 다른 삶을 가져온다. 같은 현상을 보아도 '아직도야!' 하는 사람과 '벌써?'라는 의식의 전환을 통해 관점을 달리하게 된다. 이는 원효가 같은 해골물에 대해 토했던 관점과 맛있게 먹었던 관점을 이해하면 된다.

싸울 일이 이해할 수 있는 일로 바뀌고, 갈등하고 고통할 일이 쉽게 해결하고 풀릴 수 있는 일로 바뀌게 된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수시로 일어나는데 그걸 알지 못하고, 그러한 관점에 대해 한 번도 배우거나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지는 '아! 그렇구나!'하고 알아차린 후부터 발생한다.

인간은 항상 습관화된 관성으로 대부분 살아가고, 몸이 반사적, 반응적으로 처리하기에 이런 관찰이나 인지의 과정이 없이 대응한다. 그러기에 실수가 많다.


습관적으로 대화할 때 코를 만진다든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든지, 다리를 떨고 있는데도 인지하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이 지적할 때 그때서야 인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대화에서 그런데, 하지만, 아니 등과 같은 부정형의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나 음~, 그러니까, 에~, 쓰읍, 쩝~ 등 말에 의성어 같은 습관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은 타인의 습관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예민하거나 직설적인 사람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 말해줘도 무신경한 사람도 있지만, 그걸 처음으로 깨닫고 놀라는 사람도 있다.

저의 경우도 신발 뒤끝을 끄는 성향이 있었는데, 그걸 인지하지 못하다가 고등학교 때 친구가 성인이 되어서야 이야기해 줄 때 인지하였다. 인지하고 나서는 그걸 조심하도록 신경 쓰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인지는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 역할을 한다.



[소경 ; 의식의 무의식적 상태]


그럼 알아차림이 일어나기 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경의 상태다. '너희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라고 이야기하신 것처럼 인간은 평소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정신을 놓고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며, 무지몽매한 삶을 지속한다.

그들이 가진 마음 상태가 이기적이다.


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타인을 공존의 대상으로 보기에 이기적일 수 없다. 또는 이기적이지 않으려 스스로 노력한다. 배려와 존중의 의식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 깨어 있는 의식이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마치 나침반처럼 올바른 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하면서 인지하려는 관찰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런 깨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도울 수 없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의지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도와준다고 되겠는가?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도록 놔두라고 했다. 기회를 주었지만 어둠을 택한 자는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배경 인지 ; 알아차림을 위한 프로세스]


알아차림이란 배경을 인지하는 상태다. 배경이란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과정과 원인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은 마치 수학 공식처럼 프로세스화 되어 있다. 그 순서, 곧 그 법칙을 알고 따라야 그 변화를 얻어낼 수 있다.


경험칙처럼 그것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인지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를 보이는 유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이다. 이렇게 의식적 존재는 자아의 인식자, 곧 생각과 감정이라는 인식 작용을 통해 자신을 알아차린다.

자아는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참나라는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인식하는 도구로서 중요하다. 자아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렇게 언어란 명료한 분석을 통해 삶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한다.

언어의 본래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언어라는 기호, 곧 도구적 매개체에 갇히면 안 된다. 그래서 다른 영역의 비슷한 언어를 가져와서 비교 분석할 때 그 언어의 의미는 명료해진다.

다른 영역이란 다른 언어, 다른 종교, 다른 철학, 다른 문화,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등 다른 시대와 문명권에서 그러한 삶의 철학은 어떻게 호칭하는지 비교하는 것을 말한다.


그때 인식의 확장성은 넓어진다.

언어는 본래 명칭이 없던 진리에 대해 인간이 소통의 수단으로 부여된 기호일 뿐이기 때문이다. 기호를 가지고 인간은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의미는 죽고, 도구만 우상숭배하듯 떠받들었던 것이다.

언어는 진리에 이르는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현자는 마치 강을 건너면 배를 놔두고 떠나듯 경전을 수 번에 걸쳐 공부한 다음 깨달음에 이르러 버린다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다. 몸이 진리를 구현하고 있는데, 종이와 기호 같은 경전을 섬기는 교조주의에 매몰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 ; 있음에의 도달]


있음, 곧 영혼이 자유로운 존재에 이르는 것은 도달이나 깨달음이 아니다. 도달이나 깨달음은 없는 것을 있도록 하는 과정이 있다. 이는 이해를 위한 언어적 선택이었을 뿐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내재되어 있다. 이는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상태가 있다.


사랑이나 행복 또한 같다.

없는 것이 만들어져 그러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사랑이나 행복이 있다. 다만 그것을 모르기에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순간 누구나 누리게 된다. 물론 배우고 제대로 인지하여 사랑을 알게 되지만, 사랑은 배우고 안다는 개념보다는 발견한다는 개념이 더 옳다.


갓난아기와 엄마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미혼 때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도 아이가 태어나면 무한한 사랑을 쏟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로 대부분 자연적으로 형성되지만, 이러한 원리를 알게 되면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훌륭한 사람도 처음부터 사랑이 흘러넘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방탕아에서 성자가 된 성 어거스틴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30년을 방탕하게 살다가 어머니의 13년 간의 희생과 사랑, 기도로 돌아와 위대한 성자의 사랑을 구현했던 사람이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랑이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목표 도달적 개념이 아니라 그 사랑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발견하고, 발현하는 순간 모든 사람을 향한 대가 없는 이타애는 흘러넘친다.


행복 또한 그렇다.

부자라서 행복하고, 가난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부자여도 우울하고, 자신과 세상을 비관해서 떠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난하다고 모두 불행한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오손도손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이나 사람들이 많다.

이와 같이 행복이란 스스로 자족하는 법을 발견하는 마음의 상태다.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하며, 진실된 사랑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모든 두려움과 고통, 불안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행복을 만끽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에서 관찰하려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말 못 할 사정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상심과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보려는 관심에서 시작한다.

또는 아끼고, 사랑하기에 그에게 무엇을 조금만이라도 도와주어서 그 짐의 무게를 덜어줄까 하는 염려에서 시작한다. 아주 작은 관심이 상대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한다. 아주 작은 당신의 손길이 그의 피로를 녹인다. 당신이 한 번 손잡아 줌으로 하루 종일 쌓였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을 안겨준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순간들이 매순간 가까이 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수만 가지 방법들이 있다.

또 수 천 번 아니 수 만 번의 기회들이 있다.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그가 아주 멀리 떠나 버리기 전에 말이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왔다.

그 사랑을 맛보기 위해 너와 내가 존재한다.

인생이라는 삶은 그렇게 꽃을 피우므로 향기로운 존재가 된다.

삶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너와 내가 미소 짓는 그 작은 순간들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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