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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Nov 27. 2023

소리와 의미

자아에서 존재로 탄생 과정


- 언어(言語)가 자아(自我)다 

- 자아에서 존재로 탄생 과정



■ 존재의 인식자 ; 언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지만 언어가 존재는 아니다. 존재를 담아두는 그릇이다.

그리고 존재를 보호하고, 감각하고, 인지하고, 표현하는 도구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식자다.

무엇이 무엇이라고 대상을 인식해 내고, 그것을 분별하는 잣대다.

그것이 그것이라고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위험한 찻길로 걸아가는 아이가 내 아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미친 듯이 뛰어가 구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인지할 때 그것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다음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순간 방관자가 된다.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질병과 가난으로 죽고 있지만, 나와 무관하기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의 자아나 내적 존재에 대한 관념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며, 이로 인하여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언어를 통해 자아는 형성되며, 그 언어에 의해 정체성을 구성하면서 자아를 인식해 낸다. 다시 이 자아는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존재로 가는 통로가 된다.


이렇게 언어는 자아가 누구인지 알려주며,

존재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성찰의 길을 안내한다.

이것을 명확히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된다.



■ 언어가 자아다 ; 자아의 탄생체인 언어


언어가 자아다.

자아는 언어로 인해 탄생한다. 언어가 없으면 자아도 없다.

언어로 인해 '내가 나다'라는 자의식이 탄생한다. 내가 나인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원시인은 자아가 없었다. 자각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처럼 생활했다.


언어가 대상으로 하여금 '너는 누구누구다' 하고 알려줬다.

'너는 윤정현이다. 너는 너다. 너는 생각이다. 너는 마음이다. 너는 자아다. 너는 이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자아는 탄생하면서 동물과 같았던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인지하기 시작한다. 미숙한 아이이기 때문에 정체성의 혼돈이 생긴다.


지적 배움을 통한 성장으로 자아의 가치관을 세우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되지만, 근원적인 존재의 의문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한다. 진정한 존재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인간은 삶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남겨 놓는다.


이렇게 호칭으로서 자아에게 그 이름을 만들어줄 수 있었던 그 불러줌의 대상이 바로 언어였다. 그래서 언어가 자아를 알도록 해준다.



■ 무의미인 소리와 언어 ; 불러줌, 그 의미를 입히는 작업


소리는 무의미다.

기호도 무의미다.

언어 또한 본래는 무의미다.

소리의 진동에 말을 만들고, 기호라는 문자에 의미를 담는다.

소리와 기호에 소통을 위한 개념을 입혀 언어를 의미화시킨다. 일상어를 떠나 전문 용어 또한 그들 서로 간에 필요한 이해와 소통을 위해 의미를 담아 개념화시킨 문자다.


소리에 의미를 입힐 때 그것은 언어가 된다.

원시 인류는 소리만 있었다. 동물과 같았다.

감각에 대한 반응만이 있을 뿐 자각하는 기능이 없었다. 동물이 아프거나 배고프면 우는 것처럼 초기 인류는 자각하는 자의식이 없었기에 우우~ 하고 소리만 외쳤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면서 자각하는 기능이 나타났다.

함께 생활하려면 전쟁이나 외부로부터의 보호, 사냥이나 농사, 가족 구성원의 일상적 행동을 위해서는 어떤 규칙적 소통을 요구하였다. 그것이 언어가 만들어진 하나의 원리다.


대부분의 자의식이 없는 동물은 거울을 보면 다른 동물로 인식하기에 싸우려고 한다. 하지만 침팬지나 돌고래 같은 지능이 높은 동물은 1~2살 된 아이와 같이 거울을 보면 자신을 인식한다. 아이와 같이 이런 동물은 비록 자신은 인식하지만 언어적 체계가 없기에 제대로 된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기는 어렵다.


의미가 있다는 것은 논리적이면서도 합리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더 나은 방향성을 가지고,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가치를 내포할 때 의미가 있다. 이는 나의 의견이 상대방의 의견과 다를지라도 상대방의 의견이 옳고, 타당성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원을 말한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란 이런 것이 기본 상태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고사하고, 자신과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가족 하고도 이런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대화는 갈등과 불화만을 조성한다. 그건 언어가 아니다. 강요와 독재적 성향을 지닌 지배자의 언어일 뿐이다.


무의미인 소리는 그 의미를 입히는 작업을 통해 가치를 내포한 의미 있는 언어로 한 차원 상승할 필요가 있다.



■ 존재(참나)의 탄생 ; 언어 밖의 존재


참나의 존재 또한 언어를 통한 자아로 인해 인식되는 존재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존재는 자아에 의해 보호되고, 성장하며, 인지함을 통해서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로 인해 인식된다는 것은 자아가 깨닫게 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강을 건너기 위해 배가 필요하듯 어떻게 거기에 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도구의 역할만 한다는 의미다.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떠나듯 존재가 깨어나면 더 이상 이기적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의 삶으로 살아간다. 한계에 갇혀 있던 언어는 강을 건너는 배의 역할을 한다.


배의 역할을 통해 인간은 그 자아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자아는 수많은 고뇌와 번민을 통해 자아가 자신이 아님을 발견한다. 자아를 통해 자아를 넘어선 존재의 탄생을 발견한다.


자아를 넘어 이 본질적 존재를 발견하면 우리는 서로 하나임을 발견한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며,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 또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며, 나의 아픔이 너의 아픔이 된다. 이러한 존재의 관점이 하나로 관통하면, 그동안 문자로 배운 사랑은 온몸을 통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진리로 완성된다.


우리는 상처와 아픔, 고통과 배고픔, 이별과 죽음 등의 이원성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외형상 서로 경험이 다르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동일한 아픔들이다. 다만 그 상태와 현상, 대상만 바뀔 뿐이다. 우리가 그 본질을 안다면 그 형태, 모양, 대상과 상관없이 동일한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며, 그 마음의 고통이 그대로 전달된다. 그것이 공감이며, 진실한 사랑이다.


어둠을 통해 빛을 인지하듯, 아픔과 어려움을 통해 행복을 인지한다.

자아는 자신의 이기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고뇌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거짓과 이기심으로 점철되었던 어둠은 존재의 탄생을 통해 진리의 빛을 발견한다.

이것이 물질계가 안겨주는 음양의 원리요 삶이라는 불안을 통해 안겨주는 자유의 선물이다.



■ 언어의 따뜻함 ; 언어를 다스릴 때


존재는 자아도 아니요 언어도 아니다.

존재는 가짜 존재인 허상의 자아 안에 무의식의 형태로 살다가 자각을 하는 순간 밖으로 드러난다. 의식하지 못했던 참자아(참나, 진아)는 진짜 자신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인식하면서 알을 깨고 나온다. 이것이 해탈이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 에고의 껍질을 깨고, 본질적 존재가 각성하므로 자신을 감싸고 있던 자아적 고통에서 탈피한 상태가 바로 다시 태어난 상태, 곧 해탈이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위 말처럼 자신이 인식하는 언어의 한계는 그 밖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의 언어는 따뜻하지 않다. 차갑고, 이기적이며, 각박하다.

언어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배운 언어의 개념으로 인해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익을 볼 수 없어! 분명 손해 볼 거야!'라는 언어의 지배처럼 말이다.

또 '너는 틀렸어! 왜 그런 문화, 그런 종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야!'라고 판단하는 조직이나 강자 또는 갑(甲)이 만들어 놓은 언어의 지배에 학습화된다.


언어의 지배를 받던 존재는 자각 후 언어를 지배한다.

언어를 다스린다. 언어에 갇히지 않는다. 드디어 언어라는 개념의 프레임에서 벗어났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언어에 갇혀서 사람을 비난하고, 판단하고,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주는 무서운 무기(도구)로 사용했는지 깨닫는다.


언어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언어란 아무 의미 없는 기호였음을 깨닫는다. 그런 기호는 오로지 소통을 위한 도구다. 도구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일 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언어는 우리가 서로 더 행복하기 위해 사용될 때 최적화 된다.


몸짓에서 꽃이라고 불러주는 것, 그것이 언어의 올바른 사용이다. 아무 의미 없는 기호에 따뜻한 의미를 담아 상대를 불러줄 때, 그 언어는 천상의 언어로 격상된다. 이제부터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사랑과 행복이 실려 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따뜻하다. 그러므로 그의 언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사랑이 넘친다.


존재의 집이었던 언어는 이제 자유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

자아 속에 갇혀 있던 언어는 이제 이웃을 위해 무한한 행복을 주는 포장지로 사용된다.

그 언어는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가 어찌 그리 어여쁜지. 너와 함께 살아가는 날들이 이곳 지구에 태어난 의미였어."



[자아에서 존재로 탄생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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