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없음을 통한 있음의 철학
인간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것을 이용해서 삶을 회피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는데 , 회피하려고 애쓰는 것일 뿐 진정으로는 회피하거나 도망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내부에 추적하는 추적자가 무의식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아의 무의식적 명령에 따라 도망간다.
그리고 보이는 물질적 환상을 쫓아 왜 달려가는지도 모른 채 달린다.
그래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서 괴로워하다가 다시 길을 찾는다.
왜 공허하지?
왜 허무하지?
왜 곤고하지?
왜 외롭지?
왜 우울하지?
왜 무의미하지?
왜 무가치하게 느껴지지?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영혼의 갈증은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물질적 성공, 존경받는 명예와 리더, 모든 것을 휘두르는 권력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것은 포장할 수 있지만, 내적인 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내적인 것은 오로지 내적인 것으로만 채워진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된다."
자기를 만나고, 자기를 알고, 자기를 사랑하면서, 자기를 완전하게 신뢰하는 상태에 이르면, 곧 품격과 지성을 겸비한 삶의 철학을 깨달으면 이제 영혼의 공허함은 사라지고, 스스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올바른지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고통은 축복의 포장지다.
온갖 고통을 뿌리치기 위해 도망다니지만 죽을 때까지 도망다녀도 그곳에까지추적하는 추적자에 의해 곤고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 고통은 오직 자신을 만남으로 멈춘다. 사랑도 쫓고, 물질도 쫓고, 권력과 명예와 등등 수많은 외형적인 것을 쫓고 얻어도 거기에는 항상 2% 부족함을 느낀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물론 물질적 추구의 삶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 이외에 찾고 만나야 하는 본질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통은 그것을 찾게 길을 알려주는 시그널이다.
아픔과 눈물, 배고픔과 이별, 추위와 가난, 상처와 배신, 질병과 불행들은 태극의 원리에 의해 음양의 이치를 통하여 밤이 있으면 낮이 있듯 그 반대의 충족된 삶이 있음을 알려주는 무대 장치다.
우리는 이 지구 연극 무대에서 진실과 진리를 찾는 도망자이며 추적자다.
없음의 상태에서 있음의 상태로 바뀌는 외적 현상을 통해 내적 원리의 철학을 배운다. 항상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한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처럼,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항상 배부르면 배고픔을 모르듯, 항상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은 그게 행복한 상태인지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없음을 경험함은 있음을 통하여 감사함을 배우는 도구다.
인간은 오직 고향으로 돌아올 때 행복을 발견한다. 고향은 내면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요 내면의 부름은 자신을 만나는 것이요 자신을 만남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올바름의 철학을 깨닫는 것이다.
내면의 좌표인 영혼의 부름을 따라 깨달음에 이르면 인간은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고향에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거기부터 그냥 사는 것만 남는다.
그냥 내 이웃과 함께 호흡하며, 춤추며, 노래한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변 이웃을 돌아볼 줄 알며, 긴 호흡으로 살아가는 법을 깨닫는다.
진리를 발견하고, 그걸 알아차리면서 깨어난다. 깨어나서 개념적, 이론적으로 정립이 되면 그게 깨달음이다. 깨달은 많은 사람들 중에 깨달았는데도 스스로 깨달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삶으로만 알고, 이론적으로 정립되지 않아서 그렇다. 진리에 따른 삶이 맞는지를 학문적, 이론적으로 대조하여 검증받는 작업이 깨달음을 인지하는 과정이다.
그럼 깨달음과 진리는 무엇인가?
이웃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모든 진리를 완성한 존재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도를 닦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이웃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겉으로 사랑한다 말하지만, 전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종교의 가면을 쓴 위선자들이요 가식자들이다.
깨달음은 종교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내면의 진실이 삶으로 얼마나 실천적으로 구현되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해탈이나 거듭남이라는 깨달음은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어 올바른 관점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는 삶의 전환을 말한다. 곧 이전에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인류 공동체와 함께 공존하는 방식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일 뿐이다.
구조 현장에서 우리는 '나도 모르게 사람을 구하게 되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들이 깨달은 사람이다. 이웃 사랑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깨달은 사람인지 모른다.
깨달음이라는 이론적 지식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이론적 언어일 뿐이다. '이렇게 이렇게 사는 변화의 상태가 깨달음이야'라고 알려주는 문자적 도구다.
위에서 공허하고, 허무했던 인간들은 바로 이러한 이웃 사랑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현상일 뿐이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이러한 삶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공허하지 않다. 삶은 매순간 환희의 송가가 되며, 감사와 행복이 넘쳐 흐른다. 괴테처럼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알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한 삶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모든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천사이며, 신의 아들이요 딸이다.
위선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를 하고, 종교를 믿고, 도를 닦고,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악마의 자식들이다. 악한 삶을 사는 인간들은 두 말할 가치도 없다.
인간의 영혼이 곤고하고, 공허함으로 죽을 때까지 도망자로서 추적자의 추적을 받는 삶을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다. 그것을 멈추려면 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을 실천할 때 멈추게 된다.
깨달음과 진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