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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툭 찬 고추나뭇대

배움을 남겨준 할아버지의 한마디

by 행복스쿨 윤정현


20대 중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비포장된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수확이 끝난 고추나뭇대 몇 개가 바람에 날려 길 가운데 널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발로 툭툭 차서 길가로 옮기고 걸어갔다. 그런데,


"젊은이는 천당에 가겠구먼!"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뒤 따라오시던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허허 나를 어떻게 안다고...' 속으로 그렇게 답변하며 걸어갔다. 왜냐하면 그때 청년기 삶에 대한 내적 갈등과 고민으로 많은 방황을 할 때였기에 저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은 나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사건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청년의 시기를 지나고, 중년과 장년의 삶으로 수많은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삶이라는 격량은 성공과 실패라는 언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나 한다. 인간이라면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또한 다양한 사람을 겪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늘어나지 않았나 한다.


중고생을 만나 강의를 하면서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또한 상담을 하면서 삶의 고난과 부딪히며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가운데 고등학교에서 학생들 글쓰기 수업을 하였다. 공부에 지치고, 삶이 우울한 여고생을 2년간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삶에 활력이 넘치고, 포기하였던 대학까지 진학하는 변화를 목도하였다. 그리고 그 학생이 나에게 던진 말을 기억한다.


어른다운 어른을 만났다고...

자신의 삶에 꽃이 피어나도록 물을 주었다고.


그러면서 다시 옛 잊어버렸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젊은이는 천당에 가겠구먼!"


삶의 굽이굽이를 헤쳐 나오면서 사람의 겉모습에서 보이는 작은 표정, 바디랭귀지, 태도, 말투, 수심이 가득한 모습, 밝은 얼굴, 어두운 얼굴,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 속에서 그 사람의 존재가 보였다.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온 지 그 삶의 굴곡이나 흔적들이 아주 작은 디테일에서 그 사람의 격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길 가운데 있는 고추나뭇대가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툭 차서 바깥쪽으로 버리는 모습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읽으신 것 같다. 삶의 여러 고비를 지나고 나서야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삶의 흔적이란 무엇일까?

그건 그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향기일 것이다.

그 향기가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인지 말이다. 어렸을 적에 했던 행동에 대해 곱씹어 본다. 다시 성숙한 어른으로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서 보이는 눈길 속에 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된다.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그 눈길이 어떤 눈길이었는지.

그리고 한낱 순간에 지나칠 사람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툭 던져주는 게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나는 삶의 지난한 길을 걸어오면서 배우게 되지 않았는가 한다.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 길이 어릴 적 만났던 할아버지의 향기처럼 다시 만나지 못할 타인일지라도 묵직한 기억을 남기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게 잊혀진 것 같았지만 잊혀지지 않는 배움을 남겨준 할아버지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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