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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Jan 17. 2022

같은 듯 다른 사랑

잃고 나서 알게 되는 것들

  우르스(Urs)는 춥고 험난하면서 거대한 바위 산속에 노모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기근과 가난이 몰고 온 저주는 동네 사람들을 다 떠나버리게 하였고, 폐가들만 남아 둘이서만 살고 있었다. 집에 기르던 염소도 죽었다.      

  호흡하는 것조차 버거운 삶속에서 어머니를 부양하는 아들의 고통스런 모습은 도망갈 곳을 찾게 만든다. 삶이 고단하면 인간은 자신을 강박 속에 가두면서 내면에서 선택을 강요한다.

  어두운 영상은 지금 고단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산 너머 황금처럼 빛나는 밝은 빛은 행복한 이상향을 보여준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아들은 효도하겠다며 부모를 지게에 모시고 산을 오른다. 그러나 엄마는 어느 날 지붕에서 떨어진 작은 돌멩이에 관심이 있다. 이는 추억이며 애착이다. 떠나고 싶지 않은 노모는 우르스가 화를 내면서도 자신을 챙겨주는 베개를 땅에 떨어뜨리므로 시간을 지체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단면이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때 각자 열심히 살지만 마음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싫다는 것을 표현한다. 우리는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상대 또한 그렇게 대화를 편안하게 하거나 받아들일만한 지혜로운 경험이 없기에 해야 할 미래 방향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노모가 마치 상대방이 그나마 아끼는 베개를 던지므로 ‘땡깡’이라는 감정 소모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떠나고 싶지 않은 고향을 한 번 더 바라봄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사소하지만 귀하게 여기는 물건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는 소중하지 않기에 그것을 소홀하게 대한다. 그로 인해 당사자는 상처 받는다.    

  마치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가 나름 정성스럽게 그려서 아빠에게 자랑하였더니 ‘아빠 바둑 두는 거 안 보여! 저리 가!’라고 말하거나 고구마를 깎아 인형을 만들었는데, 칭찬받고 싶어 자랑했더니 먹는 것 가지고 장난쳤다고 야단맞은 형국이다.

  또 아내가 오랜만에 맛있는 반찬을 요리하여 저녁을 차렸는데, 맛있냐고 물어보는 아내에게 ‘청소나 제대로 해라!’라고 핀잔 거리를 찾는 스타일이 좋은 관계였던 사이까지 점점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 일은 부모와 자녀, 부부, 연인이나 친구 간에도 흔하게 일어난다.

  그로 인해 서로 상처 받는다.

  처음에 그 상처는 별로 크지 않으며, 또 시간에 의해 쉽게 낫는다. 하지만 그렇게 가진 의식들은 바뀔 수 있는 기회를 찾지 않는 이상 점점 더 고착화된다. 그와 함께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마음들은 물이 흘러가듯 시간이 흐르면서 멀리 멀리 내 곁을 떠나간다.     


  어머니는 돌멩이에 대해 관심 있었고, 그 돌멩이를 매개체로 아들과 따뜻한 소통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귀찮다.

  그리고 자기 방식의 효도를 한다. 산 위에 모셔가서 밝은 태양을 보여드리는...

  그렇다고 아들이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들도 노모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며 따뜻하게 대화할 수 없음을 알기에 산을 오르는 야영 속에서도 빵조각을 접시에 드리고, 베개를 등에 받쳐주고는 홀로 잠을 청한다. 쳐다보지도 않던 노모가 빵조각을 드시는 소리를 살그머니 한쪽 눈을 뜨고 확인 후 다시 잠이 든다. 노모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면 식사를 하시든 안 하시든 무슨 상관인가? 걱정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상대에게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만 늘어간다.

  이는 죽을힘을 다해 직장생활을 하며 은퇴하기까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했지만, 은퇴 후 집에 와서 왕따가 된 실버세대 아빠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각자 다른 방식의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갓난아기일 때는 잘 들리지도 않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옹알거리는 소리에도 귀 기울여 들으려 한다. 

“애기가 ’엄마‘라고 말했어!”
“애기가 ’아빠‘라고 말했어!”

  그때는 말 같지도 않은 옹알이에 기뻐하고, 즐겁고, 행복해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제대로 된 단어를 말해도 들으려하지 않으며, 귓등으로 듣는다. 짜증나고 귀찮은 것이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었잖아!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을 하라는 거야! 피곤하니깐 더 이상 말 하지 마!’ 한 마디로 듣지 않으려는 것은 내면에서 이런 식으로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속으로 모두 외롭다.

  그리고 자기 방식의 사랑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그냥 그가 원하는 말 한마디 들어주고, 미소 짓고 사소하지만 종알종알 이야기 하는 것, 그것이 행복의 전부일 수 있다.

  아들이 가져 온 그림을 보고, “이건 어떤 의미로 그린 거야! 아! 그래! 너무 잘 그렸네. 어쩌면 우리 아들은 그림을 이렇게 잘 표현하지? 예쁘다.”

  또 딸이 만든 고구마 인형을 보고, “우리 딸은 고구마로 인형도 만들 줄 아는구나! 너무 잘 만들었다.” 

  아내가 오랜만에 반찬을 만들면, “당신은 역시 솜씨가 있어. 마치 감추인 비밀병기처럼 가끔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단 말이야!”

  이런 말 한마디가 삶의 기쁨과 희열을 가져온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활력소다.

  마치 아기를 보며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우르스는 노모가 관심을 표현한 작은 돌멩이를 쓸데없다는 듯이 취급했다.     


  상대방이 보기에 쓸데있음이 내가 보기에 쓸데없음은 무관심의 증거다.
  상대방이 보기에 쓸데없음이 내가 보기에 쓸데있음은 강요와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는 상대방이 원치 않는데, 내가 중요하게 여기므로 강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보기에 쓸데있음이 내가 보기에 쓸데없어도 말 한마디 관심을 보여줌은 배려다.
  내가 보기에 쓸데없어도 거기에 작은 관심을 표현해주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기에 사랑을 잃는다.

  타인이 원하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타인이 원하는 사랑을 하는 것은 그렇게 커다란 것이 아니다.

  그냥 잠시 시간을 내어주는 것, 그냥 작은 관심을 표현해주는 것, 그냥 미소로 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봐주는 것...

  그냥 한 번 내다버릴 시간들을 조각내어 잠시 이웃에게 짬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나 이외에 모든 사람은 이웃이다. 좀 더 가깝든지 아니면 조금 더 멀든지 할 뿐.

  짬이란 이 일과 저 일 사이에 아주 잠시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 것이다. 호흡과 호흡사이 눈 한번 마주쳐주는 것, 그것이 배려요 사랑이다.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처럼 이삭을 주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테슬라 같은 재벌이 되었어도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보다 무시하는 말투로 인해 비난받고 무의미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생을 죽도록 사랑한다고 달려갔지만 공허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 그와 마주보며 작은 미소에 평생의 행복을 다 누릴 수 있다.    

  우르스는 마지막 깎아지른 절벽에 도착한다. 마지막 관문이다. 이를 통과해야 이상향에 도착한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이것만 통과하면 될 것이라는 욕심에 친구도, 가족도, 양심도 팔아먹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관계를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

  절벽을 죽을힘을 다해 오르는 찰나 힘에 버거운 우르스는 지게가 휘청거리는 사이 그가 노모를 위해 아꼈던 베개는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아끼던 것을 잃는 것은 하나의 신호다. 더 큰 것을 잃을 것이라는.

  

  하지만 욕심에 눈이 멀면 우리는 하던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곧 눈앞에 찬란한 왕관이 씌워질 것이라는 착각에서 말이다.

  그는 힘을 배가하기 위해 한쪽 지게 멜빵을 벗어던져 버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한 번 더 솟구쳐 오른다. 

  그 순간 노모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휘청거리고 다가올 미래를 예견한다.    

  그는 이제 소원을 성취했다. 목적을 이룬 것이다.

  자신은 효도하였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고 생각하며 정상에 올랐지만 그 순간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정상에서 빛은 밝게 빛나고, 마을은 평화롭지만 어머니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셨다.

  무엇이 남았는가?

  그의 마지막 장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사랑한다고, 가족을 위한다고, 자식을 위한다고, 당신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죽도록 달려갔다.

  하지만 상대는 그 끝에서 말한다.

  '나는 그런 방식의 사랑을 원치 않았다'고...

  지금 여기서 얼굴 보며 서로 소통하는 시간이 훨씬 중요했노라고...     


  침묵이 흐른다.

  그때 어머니의 품에서 그 작은 돌멩이는 땅으로 떨어진다.

  처음 시작할 때 어머니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돌멩이는 마지막 순간 다시 보여줌으로 무엇이 인생에서 소중해야 함을 알려준다.

  그때서야 아들은 떨어진 돌멩이를 주어 노모에 손에 쥐어준다.

  우르스의 시선은 평화로운 아래 마을과 어머니를 번갈아가며 비춰준다.

  아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생각할까?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가장 하찮게 여긴 돌멩이'를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소중한 물건'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말이다.    

  그 돌멩이는 우리 각자 인생에서 살아온 날들에 대한 고향에 대한 향수 또는 자신만의 사랑과 추억들일 것이다. 

  나는 죽을 때 무엇을 마지막으로, 마지막까지 가져갈까?

  물질적인 것은 가져갈 수 없으니, 내가 그동안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가져가리라.

  짧지만 그렇게 또 짧지 않은 긴 인생의 여로에서 인연을 가졌던 사람들, 그들과 정과 사랑을 나누고 추억을 선물로 주고받았던 기억들을 그들의 이름과 함께 나의 세계로 가져가리라.

  당신을 만나서 감사하다고.
  당신을 알게 해줘서 고마웠다고.
  당신으로 인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당신의 이름 속에 따스함으로 담겨있는 그 사랑을 안고 편안하게 떠나갈 수 있었다고.
  우리 다시 만날 날들을 기약하면서...     


  인간이 철이 든다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인생의 역작 같다.

  다 얻을 것 같았지만 다 잃고 나서야 알아차리는 것처럼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하찮게 여겼던 것들이 소중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노모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가 노모의 물건들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았더라면.
  그가 노모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대화를 좋아하며, 어떤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지 아주 작은 짬을 내어주었더라면.

  그의 마지막이 이렇게 공허하지는 않았으리라.

  그가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잃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는 신호, 그 길이 아니라는 신호는 그렇게 우리의 내면과 외적 현상을 통해 시그널을 보낸다.     


  너의 욕심과 우리의 행복 가운데 선택의 기회를 준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 단편 애니메이션, Urs(우르스)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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