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쏘시개가 되어 아이들을 불타오르게 할 그런 사랑
사랑은 행복하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하다. 행복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픈 이유는 같은 지향점으로 걷는 줄 알았는데, 길을 걸으면서 그게 아님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좋을 때는 마냥 좋다. 그의 얼굴, 그의 향기, 그의 이름, 그의 미소,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없다. 잠시의 시간이라도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상실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이니깐.
하지만 슬프고, 아플 때는 너무 괴롭다. 같은 길을 걷는 줄 알았는데, 그 길이 아니었다니... 그 실망감은 상실감과 함께 좌절을 불러온다. 사람들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그 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3가지다.
가장 좋은 방식은 조율이다. 존중과 배려를 통하여 마치 시소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서로 맞춘다. 이러한 방법은 그만한 노력과 인격이 있어야 하기에 쉽지 않다. 한쪽으로만 맞춰줘도 그것은 불행이다. 마음 상심치 않도록 적절한 조율을 하면서도 서로의 성향과 필요에 따라 이쪽과 저쪽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유연함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어지기 싫지만, 지금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다른 수단을 강구한다.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스타일이다. 가스라이팅을 통한 지배를 먼저 시도한다. 그것이 먹히지 않으면 폭언과 위협을 한다. 마지막에는 폭력을 구사한다. 가장 무지한 방식이다.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도 망친다.
마지막 방법은 헤어짐이다.
이별에도 좋은 이별과 나쁜 이별이 있다. 나쁜 이별은 구질구질하게 헤어지거나 서로 원수가 되어 헤어진다. 폭언이 난무하거나 집착으로 인하여 데이트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별 후에도 스토킹으로 괴롭히기도 하고, 주변 지인들이나 직장, 가족까지 찾아가 괴롭히기도 한다. 정말 무지한 인생이다.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자신과 똑같은 존재로 상처받기 쉽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걸 인식한다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자신의 딸이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럼 좋은 이별은 무엇일까?
요새 인기 있는 화사의 노래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 수 있다. 내 아픔보다는 너의 아픔을 헤아려본다고 하면서 내 자존심도 내려놓았다고 한다. 아프지만 우리의 이별은 우아할 거야 하면서 내가 후회하도록 넌 크게 웃어달라고 한다. 그리고 고맙단 말을 전한다. 이별이 슬프지만, 세상이 나를 무시하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 하나 없어도, 스스로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내 편이 되어준다고 하면서 위로한다. 이것처럼 멋진 말은 없다. 우리는 아프면 남 탓을 한다. 원망한다. 그리고 복수하려 든다. 하지만 화사는 좋은 이별에서 원망보다는, 슬픔과 아픔보다는 자신이 자신에게 위로하면서 그 이별을 후회해도 좋다고 하면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상대에게는 고맙다고 하면서 축복한다. 그동안 사랑했었던 시간을 고마워하면서...
이것이 함께 사랑을 할 수 없다면 좋은 이별이라 할 수 있다.
10대는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이다. 학창 시절 마치 수채화로 그린 그림처럼 아련하면서 예쁜 꿈을 그려 나간다.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그리지만, 20대를 지나면서 대부분 각자의 길로 들어선다. 왜냐하면 다니는 학교가 다르고, 직장이 다르면서 공간이 주는 거리감은 스스로 주저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사랑이 실현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그러나 그 사랑의 추억은 너무나 아름답기에 평생을 책갈피처럼 가슴에 간직한다.
20대는 불같은 사랑이다. 폭풍처럼 몰려왔을 때는 누구도 감당 못한다. 친구나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하지만 이별도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다. 질풍노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무엇이든 도전하는 시기다. 두려움도 없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덜하다. 이때는 사랑을 많이 해보길 권한다. 실패해도 좋고, 거절받아도 좋다. 그 경험이 다음 시기를 살아가면서 단단해진다. 그 아픔은 30대, 40대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 맛보지 못할 시기와 시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가정 걱정, 자녀 걱정, 주거 걱정, 직장 스트레스로 더 이상 그런 불같은 사랑에의 도전은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20대가 지날수록 수많은 계산을 해야 한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연애하기에는 너무 에너지 소비가 크기에 20대의 열정으로 사랑을 할 수 없다. 그건 그때만이 누릴 수 있는 젊음의 특권이다. 대학생 때, 사회초년생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사실은 40대가 지나 보면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라!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멋진 사랑을! 그건 열정이 불타오를 때 할 수 있는 기회이며, 특권이다. 다음 시즌이 오면 생계의 전쟁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테니.
30대의 사랑은 책임 있는 사랑이다. 이제 사랑에는 깊은 책임과 의무 그리고 결혼과 가정까지 그림을 그리는 사랑이다. 그냥 좋아함만을 위해 사랑할 수는 없다.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꾸릴 가정을 생각해야 한다. 저축이나 경제적인 부분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와 어른으로서 책임을 준비하지 않으면 마냥 의존적이고, 무책임하면서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아갈 수 없다. 사람의 소중함과 인연의 귀함을 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만남의 인연이 오히려 악연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헤어질지라도 화사의 ‘굿 굿바이’ 이별처럼 아름다움으로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
40대의 사랑은 성숙한 사랑이다. 이제 어른으로서 가장의 책임을 지지만,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여하고, 참여하고, 책임을 느낄 줄 아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 가정만의 가장이 아니다. 사회는 또 다른 면에서 큰 가정이다.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에 함께 책임을 지는 시민의식이 필요한 시기다. 그 가치관이 결국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토대가 된다. 우리 모두의 후손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아름다운 터전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참여가 없을지라도 함께하려는 민주주의 의식은 우리가 발 디디고 걷는 토양을 행복하게 숨 쉬게 하기 때문이다.
50대의 사랑은 공동체적 사랑이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 성장하였고, 직장생활도 책임자의 위치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볼 줄 아는 시기다. 이제는 자신의 취미생활도 조금은 여유를 찾는다. 그래서 사회의 직접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봉사나 기부, 재능을 나누는 기회를 통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회를 살찌우는 것뿐만 아니라 자녀들 또한 부모의 훌륭한 모습을 보면서 배운다. 그리고 존경한다. 거기에 가정의 행복은 덤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베푸는 것 같지만, 그 나눔을 통하여 그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성숙한 삶의 행복을 돌려받는다.
수많은 권력자와 성공한 부자들이 허무하게 시들어버리는 인생을 우리는 목격한다.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스스로도 행복한 삶을 평생 누려도 남을 부와 권력으로 비난과 무시를 받는 길을 택하고, 심지어 감옥까지 가면서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보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50대가 지나면 가져야 할 공동체적 사랑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삶에 대한 가치관이 없으면 뇌가 텅 빈 인간밖에 안 된다. 나이만 먹은 어른일 뿐 아무 가치가 없다. 존경받지 못하는 어른들이 부지기수인 이유다. 나이와 함께 먹어야 할 정신 연령이 함께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0대 이상의 사랑은 이웃 사랑이다. 60대는 은퇴의 시기다. 50대가 공동체에 가끔 참여하는 삶으로 살아갔다면, 60대의 사랑은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다. 인간은 외로워서 혼자는 살아갈 수 없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불어 나누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60년 이상을 사회에서 익힌 지적 자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삶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 나눔은 정말 값지다. 묵직한 사랑이다. 말없이 전달되는 것 같지만, 상대방이 그 마음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가장으로서, 책임자로서, 관리자로서, 사회의 참여자로서 살아왔던 애환이 그의 주름진 이마와 표정에 묵직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그걸 깨달았다. 동아리와 달리 열린 교실에는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많이 있다. 거기에 처음에는 글쓰기를 많이 하고, 그걸 책으로 만드는 일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마음을 읽어주고, 대화를 경청해 주며, 공감해 줄 어른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이 들어 홀로 되면 말을 하고 싶어도 주변에 말할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 독거노인이 고독사하는 이유도 그렇다. 주부들도 수다 떠는 것처럼 좋아하는 것은 없다. 마음이 아프고, 우울하고, 길 잃은 10대의 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마음을 열고 대화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때 세상의 애환을 삶으로 겪은 어른들의 여유와 따뜻한 공감이 필요하다. 난 그 아이들과 글을 많이 쓰는 것보다는 소통의 거리를 나누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내 위주의 대화가 아니라 학생들 위주의 대화 주제가 마음을 열었고, 글을 쓰는 것도 그렇게 풀어놓은 소재들이었다.
그렇게 자신도 자신을 포기했던 학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듯, 사랑을 먹으면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공부도 포기하고, 내신도 좋지 않고, 대학을 생각조차 못했던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를 하고, 자신감을 찾는 모습을 보았다. 글쓰기 공모전에 도전하여 장려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노력했던 아이들 중에 대학까지 들어간 학생들도 있었다. 수능이 아닌 논술과 글쓰기 실기로 합격하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이었다.
알고 보면 죽을 사람이 사는 것은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내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려는 마음이다. 삶의 다양함을 겪고 몸에 배인 어른이 되면, 누구나 그 사랑을 나눌 줄 안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불타는 사랑의 시기가 지나고, 다 꺼진 것 같지만, 다시 불쏘시개가 되어 아이들을 불타오르게 할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삶을 보면 만남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부모와 만남도 약속된 것이 아니고, 친구와 만남도 전혀 모른 남남이 만나고, 연인과 결혼도 그렇다. 우리는 모르는 우연 속에서 그 만남이 필연이 되고, 운명이 된다. 다시 태어날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누가 나의 자녀로 태어나는가? 우연처럼 다가온 그 자녀는 평생을 책임지는 운명이 된다. 그 운명이 사랑의 물결을 타고 이어지면 세상의 인연으로 퍼져 나간다. 또 다른 어른으로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거기에 당신의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손길을 통해 살아날 어린 영혼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10대, 20대의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시간도 필요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30대부터는 그 사랑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나이와 함께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 사랑은 더 확장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가족에서 출발하여,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존재에게 확장될 때 우리는 왜 이런 사랑이 필요한지 깨닫는다. 그 사랑은 귀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만, 그 사랑을 나누려는 사람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사랑아!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마음을 다 사로잡아 버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