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빈곤과 마음의 양식
물질적 풍요와 정신의 빈곤이 주는 고통 ; 소외감과 외로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소외감이나 외로움이다.
이는 배고프거나 아프지 않은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요 비참함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그 공허함과 허무함, 무가치함이 주는 내면의 고통을 도대체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죽어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시간들이 주는 고통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다.
이 내면이 주는 고통이 찾아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겨낼 방법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는 길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그 질문에 길을 찾고, 방법과 원리를 제시했던 자들이요
종교인들은 그 길을 해결할 수 없어 내세와 신께 의탁한 자들이요
심리학은 그 길을 심리적 흐름과 내적 원리를 이해하여 근원적 대처법을 알려주는 자들이요
문학은 타인의 삶을 조명하여 비교와 인지적, 객관화를 통해 성숙을 알도록 하는 자들이요
역사는 역지사지, 온고지신을 통해 반추와 교훈을 배우도록 기록으로 길을 찾게 한다.
수단과 방법은 다양할지라도 그 목적이나 지향하는 바는 모두 같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과 행복, 공존을 지향하는 모든 것은 홍익인간의 길을 배우게 함이 그 모든 것에 스며 있다.
기능과 기술, 재능을 배움은 외적 풍성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지만,
순수학문은 내적 양식을 채움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같은 듯 하지만 그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르기에 인간이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물질적 풍요를 누릴수록 그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정신적 빈곤함이나 내적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그로 말미암아 정신적 풍요로움을 알지 못하고, 채우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은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해 우울해지거나 자살을 택하는 이유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이며 원리다.
오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상관없다.
그들의 삶의 최종 목적은 쾌락뿐이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우울감, 상실감은 없다.
하지만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을 정리함에 존재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산 것인가?
그렇게 살아서 결론은 무엇인가?
내게 남겨진 것들은 무엇인가?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제대로 살았는가?
나는 타인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가?
내가 죽은 후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양심에 질문하기를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 아니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경할 만 한가?
이러한 질문을 조금이라도 생각한 사람은
물질적 삶과 정신적인 삶에 대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두고
수많은 저항과 갈등을 한 사람이다.
그것을 잠시 하다 멈춘 사람은 정신적 삶이 없다.
그것을 간헐적으로 하는 사람은 취미와 문화생활로 때운다.
그것을 자주 하는 사람은 마음의 양식을 찾는다.
그중에 종교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리 상담이나 코칭을 받는 자가 있으며,
철학적인 길을 걷는 자도 있다.
그것을 통해 투사하거나 왜곡하거나 전이시키는 자들이 있고, 진정으로 위로와 힐링, 정신적 성찰과 배움을 통해 성숙해지는 자들이 있다.
앞의 사람들은 페르소나의 가면을 쓴 위선자요
뒤의 사람들은 배움을 통한 실천으로 인격적 성숙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깊은 성숙에 이르면 갈등이나 방황, 저항을 완전히 멈춘 자들이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적 고민이나 자아적 문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오로지 타인을 위한 질문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고민만이 그의 전부를 차지한다.
이들은 성찰을 통해 통찰한 자들이며, 홍익인간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 남은 시간을 이어간다.
시대마다 성현들이 그 길을 걸어갔고, 우리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었다. 현시대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 이태석 신부나 법륜 스님이 그러한 길을 갔으며,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다. 외롭게 살아가지 않도록 서로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정신적 고갈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인생의 종착역까지 달려왔어도 속이 텅 비었기 때문에 살아갈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힘으로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 자살이다.
이들이 자신에게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그것을 택하라고 해도 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빛이 나고,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빛을 낼 수 있다는 존재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이들의 삶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통찰한 자와 속이 텅 빈 자의 차이는 알고 보면 종이 한 장 차이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님으로 인해 생과 사를 넘나 든다.
인생사 모든 것이 알면 쉽지만, 모르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다.
정신적 빈곤을 채우는데 현대인들은 조금이라도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말년에 이르러 소외감이나 외로움, 삶의 공허를 마주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 대상이 당신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 내적 질문을 멈춘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괴테의 말처럼 자신을 완전히 신뢰한 사람이라면 멈춘 자다. 그런 사람은 진심에서 이타적으로 살기 때문에 스스로 양심에 걸림이 없으며, 사람에게서 향기가 난다는 것을 인지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을 내적으로 바라볼 때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자님이 말씀하신 일이관지다. 하나에 진리가 다 들어 있다.
바로 이웃 사랑에.
"스스로를 신뢰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된다."
(As soon as you trust yourself, you will know how to live.)
- 괴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