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채워진 상태를 content라고 한다. I am content. 굉장히 만족스러운 상태를 뜻할 때 하는 말이다. 요즘 내가 그렇다. I am so content.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삶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다. 크고 작은 사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글로 쓸만한 소재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려면 분명한 불편이 있어야 하는데, 딱히 없다.
세상의 모든 게 불만일 때가 있듯이 모든 것이 그러려니 싶을 때가 있다. 무감각한 상태라서가 아니라 모든 게 그냥 그런 거라는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인다. 엄마의 뇌동맥류가 더 나아지지 않은 것도, 큰 아버지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것도, 나의 이갈이가 날로 심해져 치과에서 마우스피스를 권유받은 것도, 그냥 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듯, 낮과 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도 새삼스럽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게 참으로 덤덤한 동시에 평화롭다.
며칠 전은 성금요일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가톨릭과 기독교,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믿는 종교와 모든 분파에서는 이 성금요일을 특별한 날로 정하고 성찬식을 통해 이날을 기념한다. 나도 예수님을 성자 이상으로 믿기 때문에 이날을 따로 떼어두고 특별히 신경 썼다. 밤에는 교회에서 특별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했는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그 자리에 갔지만, 이상하리만큼 나의 죽음을 선명하게 느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 평소에는 너무 쉽게 말했던 이 문장이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그 무게가 너무도 무겁고 두려웠다. 성금요일에 나는 나의 죽음을 애도하며 크게 울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더욱 빛나는 거라는 말을 들었다. 누구든 죽음에 대해서,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며 당연한 듯 말하지만, 정말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자.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알 수가 없다. 타인의 죽음은 알아도,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시기도 모르고, 어떤 감각인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 - 살아있는 동안에는 - 결코 알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죽고 싶지 않다. 영생하고 싶은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조금씩 느낀다. 죽고 싶지 않아! 정말이지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날, 성금요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나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그날 죽었다.
그렇게 나의 삶을 통째로 내려놓고 나니 모든 것에 의연해졌다. 아무리 알고자 발버둥 쳐도 뭐가 되었든 영원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요한복음을 폈다. 여기에는 생명에 대한 여러 가지 설교가 나온다. 모든 문장과 뜻을 이해하고자 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오셨다.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주인공 존스노우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하는 말이, 죽음에는 참으로 깊은 어둠밖에 없다며, 죽음을 경험한 것에 대해 치를 떠는 장면이 나오는데, 궁금하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어떤 시공간이 존재했을지. 나의 죽음에는 무엇이 있을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