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있는 용기
캄보디아, 가장 기억에 남는 것
ㅣ 미션 스테이트먼트
도착 첫날, 지부장님은 내게 “자신만의 인생의 비전을 적어보라”라고 하셨다. 삶의 방향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그날, 왜 이곳에 왔는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내 인생 처음으로 진지하게 글로 적었다. 그 문장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내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꺼내어 읽어본다.
ㅣ 열정적이고 수줍음 많은 직원들
무더위보다 더 뜨거웠던 건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열정이었다. NGO 사무실의 직원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단순히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에겐 사명감이 있었다. 태양광 보급이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는 아픈 현대사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크메르루주 정권* 시절의 비극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에 깊게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하나같이 수줍음이 많았고,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데조차 조심스러워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1975-1979, 캄보디아를 지배한 급진 공산주의 정권으로, 폴 포트의 주도 아래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킬링필드'를 자행함. 캄보디아를 중세 농업 사회로 되돌리려 했으며, 도시 거주민들을 강제로 농촌 공동 농장으로 이주시켰고, 지식인과 소수 민족 등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 특히 진실이나 비판 발언을 하는 사람을 처형함.
그래서 그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시간과 진심이 필요했다. 낯선 문화의 사람들과 조심스러운 대화 속에서 조금씩 쌓여가는 신뢰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면,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가치관 속에서 부딪히기도 하고 배워가기도 한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다름’을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해외 생활에서도 큰 자산이 되었다.
ㅣ 1년 내내 무더운 날씨
캄보디아에서의 일상은 늘 뜨거운 햇볕과 함께였다. 특히 내가 있던 곳은 태양광 에너지 기업이었기에, 사무실조차 태양광으로 돌아갔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사무실 안에 앉아 있으면, 마치 온몸이 태양 아래 그대로 노출된 것처럼 달아올랐다. 얼굴은 매일 붉게 익었고, 셔츠는 땀에 젖기 일쑤였다.
그 무더위 속에서 내가 의지하던 건 시원한 과일들이었다. 길가 노점에서 코코넛을 얼음에 넣어 마실 때면, 입안 가득 시원함이 번지며 몸속 열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그 작은 한 모금이 오아시스 같았고, 내 하루의 활력소였다.
캄보디아에는 특히 다양한 과일들이 많았는데, 특히 망고와 수박은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어찌 된 영문인지 태양광 센터 마당 한가운데 수박이 떡하니 자랐다. 아무래도 누군가 수박씨를 뱉은 것이 그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란 듯하다. 누구 하나 물 한번 직접 준 적이 없는데 이렇듯 잘 자란다.
센터 주위에 망고나무들도 있어서 점심에 간식으로 직원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따뜻하고 습한 날씨 덕분에 과일들은 참 자랐고, 나는 그 덕에 맛있는 과일을 원 없이 먹었다.
ㅣ '돕는다'는 것의 의미
예전의 나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면 단순히 무언가를 ‘주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정말 많은 것이 필요했다. 물질적 지원은 물론, 교육과 보건 서비스, 안전한 환경, 그리고 전기까지, 너무나 많은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했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다. 전기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오고, 학교에 가면 교사가 있고, 아플 땐 병원이 있다. 하지만 세계의 어떤 곳에서는 정부에서 여력이 없어 그 기본적인 조건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현지 및 해외 NGO들이 돕는다. 그리고 그 NGO들이 더 많은 곳에 손길을 뻗을 수 있도록 또 정부와 기업이 지원을 해준다. 그리고 그 복잡한 과정 속에서 나 같은 작은 봉사자는 성과 보고서 하나, 재무 보고서 하나를 맡아낸다. 이렇듯 모두의 관심과 손길이 모여 한 아이와 마을에 닿는다.
전기가 들어오자 주민들의 삶은 달라졌다. 주민들과의 사용 후기 인터뷰에서, 저녁에도 다양한 일을 이어갈 수 있었고, 집은 더욱 안전해졌다고 한다. 호롱불 대신 환한 전등이 켜지자 아이들은 밤에도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을 곳곳에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났다.
1년 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그 추억이 너무 좋아서 귀국 봉사자 교육에도 참여했다.
서울·경기 지역의 초중고에 파견되어 국제개발 협력 세계시민 교육을 세 번 정도 맡았다. 캄보디아에서의 경험을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전하며, 그들이 한국을 넘어 글로벌 이슈에도 관심을 갖도록 돕는 일은 참 보람 있었다.
그러다 곧 서울에 있는 한 기관에 취업했지만, 내 시선은 줄곧 해외 현장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마침, 내가 후원하고 봉사했던 NGO에서 또 해외 파견 공고가 났다. 망설임은 없었다. 지원했고, 다행히 합격했디.
이번에는 봉사자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아시아가 아닌 아프리카, 모잠비크로.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다음편: 모잠비크 1편. 아프리카에 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