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 살입니다.

[프롤로그] 나의 나이테를 그리는 시간 - 쉼표

by 라벤더핑크


요즘처럼 코로나로 삶이 지치고 힐링이 필요할 때일수록 사람들이 더 큰 관심을 가지는 통나무집, 통나무 식탁, 통나무 욕조. 벽돌처럼 중후만 매력을 뽐내지도, 대리석처럼 화려하게 눈을 끌지도, 아크릴처럼 실용적이게 가볍지도 않지만, 그 특유의 투박하면서 안락하고 편안한 매력으로 사람들이 힘들고 지친 순간이 찾아올 때면 쉬어갈 수 있도록 내 옆에 두고두고 눈에 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나에게 쉼터가 되어 줄 통나무 식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자연이 마치 화가가 되어 나무줄기를 도화지 삼아 세월이란 붓을 들고 때로는 더하고 때로는 덜어서 그려놓은 그 정갈한 선과 무늬를 보고 있자면, 봄철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가을 바람, 한여름의 폭우와 한겨울의 폭설, 그 기쁨과 시련의 시간을 꿋꿋이 이겨낸 세월의 흔적과 무게가 느껴져서 일까, 스스로 겸허해지고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 것 마냥 편안해지기도 한다. 인간이 창조한 예술품도 눈과 귀를 사로잡지만, 나는 아직 자연보다 뛰어난 예술가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잠시 예술작품의 감상적 감성을 접어 두고 초등학교 과학 상식의 이성으로 돌아와 얘기하자면,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는 계절별로 나무의 성장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름엔 나무가 자라나는 속도가 빠르고, 겨울과 같은 시련 속에서는 천천히 자라면서 자연스레 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와 같은 열대지방의 나무에는 나이테가 없다. 더운 여름은 쑥쑥 나무를 키우기만 해서 나이테가 생길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나이테는 추운 겨울에만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겨울이 더 혹독할수록 나이테도 더 촘촘해진다. 보기에는 멋들어진 나이테는 사실 겨울이란 추운 날씨를 홀로 곱씹고 인내하며 그 힘든 시간을 속으로 하나하나 스스로 새겨 넣은 나무의 인고의 나이와도 같았던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도 열대지방처럼 사계절이 마냥 무덥기만 한 날씨였다면, 우리는 나이테와 같은 멋스러운 무늬가 아니라, 아무런 선도 없는 밋밋한 통나무를 봐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내 이력서를 본 사람들은 나에게 참 부지런히 살았다고들 얘기한다.


성적은 학과 1등으로 졸업, 자격증으로 증권투자상담사와 파생상품 거래 상담사, 외국어로 치자면 영어 970의 고득점 토익, 프랑스어 Delf B2, 일어 JLPT 3급 깊이가 무척 얕긴 하지만 일단 4개 국어 가능하고, 대학교 때부터 각종 대회 수상 및 4년 내내 받은 내/ 외부 장학금, 칸이 모자라 쓸 때마다 줄여 적는 각종 봉사 활동 및 사회 활동 경험, 캐나다 교환학생, 미국 뉴욕 인턴쉽 경험…


이력서를 빼곡히 채운 경험들 덕분일까. 경력직을 선호하는 바라던 외국계 회사에서 신입으로 입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힘들다는 회계 부서에서 14여 년을 거의 쉼 없이 달려온 나…


돌이켜 보면 인생에서 뒤로 물러설 줄은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알았던 나에게도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멈춰 서야 할 순간들이 때때로 찾아왔다.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빙빙 제자리걸음만 하며 정체되었던, 내 인생의 실패기가 아닌가 생각 들던 당시에는 마냥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더딘 시간들이, 지금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더 큰 획을 긋기 위한 준비기이자 도약기였고, 재충전할 수 있었던 휴식기였다. 정작 내 인생에서 굵직하고 멋들어진 나이테의 선을 그어 놓은 것은 내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 봄날도, 무럭무럭 자란 여름도, 풍성한 열매를 맛본 가을도 아닌 오들오들 떨던 혹한기의 그해 겨울이었다.



비록 내일모레면 유혹에 흔들림이 없어진다는 불혹의 마흔을 코 앞에 두고 있지만,



나무의 인생으로 치자면, 3번의 제자리걸음을 맛 본 나는, 이제 겨우 나이테 세 개 그려진


3살 배기 꼬마 나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