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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더핑크 Aug 19. 2021

관용여권은 별책부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내 인생의 하나뿐인 관용여권

   나는 여권에 도장 찍는 것을 좋아한다. 


내 인생의 발자국을 꾸욱 남기는 것 마냥 국경을 넘나들 때마다 쾅하고 찍히는 스탬프 소리가 그렇게 경쾌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유럽에 가면 1+1처럼 한 번에 많은 스탬프를 받아 올 수 있어서 왠지 더 기분이 좋다. 그래서 나는 나의 발자취가 담긴 만료된 여권도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둔다. 헌데 세월이 흘러 몇 번 이사 끝에 자취를 감춰버려 엄마가 버린 줄로만 알았던 내 인생의 첫 만료된 여권인 관용여권이 이사를 위해 본가 집 짐을 정리하다 오래 묵은 상자들 틈 속에서 발견되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관용여권. 그 첫 페이지를 펼치면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이 관용여권 소지인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캐나다 교환학생이 첫 해외 경험이었고 미국행이 겨우 두 번째 출국이었던 나는 기존 일반 여권을 외교부에 맡기고 관용여권으로 대체 발급받았던 터라 처음에는 이 문구가 엄청 특별한 것 인 줄로만 알았다. 


  십여 년이 지나 좀 더 많은 해외 경험을 해 본 지금은 별 것 아니었구나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일반 여권도 같은 문구가 적혀 있고, 심지어 좀 더 길다. '이 관용 여권'을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으로 바꾸면 정확하게 일치한다. 심지어 영어에는 그저 'of this official passport'란 한 문구가 더 들어간 정도일 뿐이다. 관용여권이 입출국 시 빠른 허가를 유도하고 유사시에 긴급상황에서 소지자에게 도움을 좀 더 용이하게 이끌어내는 보호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긴 하지만 짧은 만료기간으로 인턴쉽 종료 후 불필요한 해외 체류를 막고자 하는 관리와 통제의 수단이기도 한 족쇄가 될 수도 있는데, 그때에는 처음 받아 든 관용여권이 마냥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21년 말부터 적용될 보안과 디자인이 업그레이드된 전자여권

  특히, 당시에는 관용여권이 일반여권과 색깔이 달라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일반여권이 남색으로 변경된다고도 하는데 당시에만 하더라도 모두 초록색이었다. 공항 입국장에서 대한민국 국민 줄에 모두들 초록 여권을 쥐고 있는데 갈색 여권이 눈에 뜨이면 누군가 알아보고 혹여 훔쳐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나 홀로 착각에 007 첩보요원이라도 된 마냥 여권을 품 안에 꼭꼭 숨겨 깊은 곳에 넣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좀 더 해외여행 경험을 겪어 본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중국인이 줄 잘 못 섰겠거니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색깔이 중국이나 태국 여권과 무척 비슷하다. 



★ 아래는 저와 같은 무지를 범하지 않도록, 참고로 상식으로 알아두면 좋을 국가별 여권 색이에요!






  또 비행기 안에서는 왠지 모르게 스튜어디스가 알아볼 거라 생각해 행동을 최대한 자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행동에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하루에도 수많은 외교직원과 유명인사를 보는 그들에게는 비즈니스석도 아닌 일반석에 앉아있던 나는 그냥 일반 손님과 별반 다름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곤 오랜 시간 품에 감춰온 여권을 꺼내 신분 확인할 시간이라도 다가올 때면, 내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도시락 폭탄을 품은 윤봉길 의사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처음 사용해 본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무덤덤하게 무척이나 익숙한 상황인 양 표정 관리하려 노력하지만, 심장은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마추어처럼 제멋대로 나대기 시작한다. 


   그때의 그 떨림, 설렘 그리고 자부심이, 다시금 관용여권을 펼쳐 넘기자 마치 별책부록처럼 머릿속에 새록새록 샘솟아 오른다.


   그렇게 뉴욕 인턴쉽의 별책부록 같던, 나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안겨주었던 관용여권이 이제는 서랍 한편에서 또 다른 만료된 여권들과 함께 고이 추억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절대 바래지 않을 것 같은 갈색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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