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벤더핑크 Aug 20. 2021

애국자와 애모자

사랑의 짝대기

  내게 조카가 세명 있다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언니가 무척 애국자이시네요!


 그렇다. 우리 언니는 애국자이다. 

(그리고 나는 안타깝게도 아직 비애국자다.) 


리 형제도 3형제인데, 언니는 조카를 세 명 낳아보더니 우리 3형제를 키운 엄마께 새삼 감사함을 느껴 더욱 효녀가 되는 듯하다. 아이들 세 명을 키우는 게 보통일이 아니라고. 언니랑 영상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조카들 세 명이 번갈아 달려들며 폰 쟁취전을 해대는 통에 항상 시끌벅적하다. 언니에게 전할 간단한 한두 마디 대화가 조카들과 번갈아 인사하다보면 한 시간이 다되어서야 끝이 난다. 


     어릴 때 언니와 한 방을 써서 항상 언니와 대화를 많이 하고 모든 것을 의논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요즈음은 마주 앉아 있어도 세 조카 틈에서 언니와 오붓이 대화하기 조차 힘들다. 막내는 연일 엄마와 이모를 부르며 같이 놀아달라 안기고, 첫째와 둘째는 TV나 장난감에 열중하다가도 싸우면 중재해줘야 하고, 곰돌이 인형은 어디 있냐, 블록이 안 맞는다, 배고프다, 책 읽어달라, 간식 달라, 같이 색칠 놀이하자, 화장실 급하다, 한 명도 버거울 아이들이 세 명이서 연거푸 돌아가며 언니를 찾아댄다. 어디 그뿐이랴. 삼시 세끼 식판 세 개를 배식하는 건 기본, 세 명 분 빨랫감에, 여기저기 어질러 놓은 장난감과 간식 부스러기 청소는 애교요, 틈틈이 갓 초등학교를 들어간 첫째의 받아쓰기와 숙제도 봐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기억력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던 언니는 이제 해야 할 일을 두세 개씩 알람을 맞춰놓고도 등대 불처럼 매일매일 깜박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 옆에서 새하얀 등대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날도 언니와 서류 작성할 일이 있어 집중해서 작은방 컴퓨터 앞에 잠시 앉았는데, 첫째 조카가 물이라도 엎었는지 큰일이라도 난 듯 거실에서 언니를 다급하게 큰 소리로 부른다.



"엄마!!!"



첫 외침에도 막 집중하기 시작한 언니가 즉시 답이 없자 연거푸 조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온다.



"엄마!!!"



집중해야 할 일인데 자리에 엉덩이 의자에 붙이기 바쁘게 방해받은 것에 대해 살짝 예민해진 언니는 모니터를 응시한 채 '엄마 한창 바쁜데 왜 또 찾니' 란 의미가 응축되어 단전에서부터 끌어 나오는 복식호흡의 외마디이지만 실상은 한마디 같지 않은 톡 쏘는 특유의 경상도 악센트를 담은 한마디를 소리쳐 내뱉는다.


"왜??!!!!!!!!!!"
















잠깐의 침묵 끝에 들려온 한마디.



"사랑해~"


첫째 조카의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온 스위트 하면서도 무심한 외침에 언니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렇지만 여전히 눈은 모니터를 응시한 채 익숙하다는 듯 시크하게 거실 쪽을 향해 다시 한번 단전에서 끌어 오르는 복식호흡으로 소리쳐 응답한다.


"나도 사랑해!"


시크한 두 모자의 뜬금포 무심한 사랑고백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웃음이 피식 났다. 


갑작스러운 고백 멘트가 궁금해진 나는 이후에 조카를 조용히 붙잡고, '근데 아까 네가 그렇게 좋아해서 끄면 울고불고하는 유튜브 보다가 갑자기 왜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어?'라 물어보니, '엄마가 너무 좋아서 말하고 싶었는데, 나중에 얘기하려면 까먹을까 봐, 까먹기 전에 얘기하려고 그랬어'라고 담백하게 답한다. 그리고 하루에 한두 번씩은 꼭 그렇게 엄마를 불러 얘기한다고 한다. 그런 조카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는데, 나도 몇 번 듣다 보니 조카의 신선한 사랑고백도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저마다 장점과 특색으로 적어도 한 가지씩 배울 점을 누구나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단점만 가진 사람이 설령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나보다 한참 어린 조카들이지만 어른보다 낫다란 생각을 문득할 때가 있다. 어른들은 과연 아이들처럼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즉각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마치 나이만큼이나 여러 층의 필터가 입을 휘감고 있어, 속에 있는 말이 튀어나오려면 몇 번의 망설임과 필터링을 거쳐야 비로소 입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기분이다. 더욱이 그것이 낯간지러운 표현일수록, 이미 첫 번째 층에서 걸려 버린다. 나는 과연 우리 3형제를 키워주신 엄마께 이런 시크하면서 스위트 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란 의문을 스스로 던져보면서, 차오르는 감정 그대로 식기 전에 매일매일 솔직하게 전달할 수 있는 조카에게 어른들은 오래전 잃어버린 표현력과 솔직함 그리고 용기를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했다. 



글을 읽고 용기를 조금이라도 얻으신 분들은 오늘 한번 도전해보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요.








 



매거진의 이전글 관용여권은 별책부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