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36번부터 40번까지 들어가시면 됩니다."
난 38번이다. 삼팔 광땡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으려나?'
정장 둘, 캐주얼 셋. 대기실에서 같이 일어난 이들의 옷을 보며 약간의 안도 내지는 우월감 같은 게 들었다.
급하게나마 어제 마리오 아웃렛에서 반값 할인하는 짙은 감색 정장을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어설퍼 보이는 형이었지만 옷을 같이 골라줬던 어제만은 꽤 든든했다. 검은색 정장 양말도 같이 사야 한다고 얘기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널따란 회의실에는 의자 다섯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 앞에는 누런 빛이 도는 책상을 38선 삼아 앉아있는 남자 둘, 여자 하나가 보인다. 깊은 바다 빛깔의 똑같은 유니폼 상의를 입고 있는 그들을 보니 세 명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한 덩어리의 어떤 존재 같다.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가 말을 꺼낸다. "순서대로 자리에 앉으세요."
"반갑습니다. 추운 날씨에 아침 일찍 멀리 이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36번부터 차례대로 간략하게 자기소개랑 지원동기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척추를 곧게 펴고 손은 주먹을 말아 쥐고 정면 십오 도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36번의 얼굴과 표정은 볼 수 없다. 다만 그의 상기된 목소리와 버벅거리는 말투에서 긴장을 많이 하고 있음을 유추해볼 뿐이다.
쏜살 같이 37번의 자기소개까지 마치고 내 차례가 되자 웬걸 내 머릿속은 말 그대로 백지가 되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들여다보고 중얼거렸던 자기소개 멘트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고 한 문장의 말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수원에서 온 스물아홉 살, 38번입니다."
그다음에 무슨 말은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무뚝뚝한 표정의 존재들이 책상 위에 놓은 서류와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봤다는 것, 그리고 나선 어느새 39번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30분 나누기 5명. 대략 일인당 6분. 학교 다닐 때 수학을 잘 못했던 내 머릿속에서도 쉽게 답을 구할 수 있었다. '6분'이란 시간에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봉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 휴게소 가락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시간에. 평소 말주변이 없던 터라 빨리 마치고 이 불편한 자리를 뜰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럽게도 느껴졌고, 한 편으로는 두 시간 걸려 여기까지 왔는데 내게 배정된 시간이 너무 짧다는 느낌은 여전히 지울 수 없었다.
난 분명 이 차갑고 딱딱한 철제 프레임 의자에 앉아있는데 내 안에서는 여러 생각과 감정이 뜨고 지고를 반복한다. 분명 멍 때리는 건 아닌데 멍 때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도.
살면서 도끼 같은 문장을 만나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거 같은데, 이 질문이 내 귓가를 때릴 때 도끼처럼 느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2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