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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말고 12시 10분에 만나요

시간의 여유를 누리는 삶을 바라며

by 인생여행자 정연
출근 시간이 오전 8시라는 건,


오전 8시까지 사무실에 도착하라는 게 아니에요. 오전 8시에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언제까지 사무실에 도착해야 할까요? "


팀에 배치받고 오리엔테이션을 받던 신입사원 시절, 어느 선배가 던진 질문이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10분 전인 7시 50분? 아니면, 30분 전인 7시 30분?, 그것도 아니면 한 시간 전인 7시?

정답은 있었던 질문이었을까? 새삼 생각해본다.




이른 아침 하루를 시작했던 창업주의 생활습관은 사무실 한편에 '근면'이라는 붓글씨에 실려 지금도 액자에 걸려있다. 하지만 그 액자를 사무실에서 인지(!)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유심히 벽을 훑어보지 않는 한 쉽게 찾기 어렵다. 바로 매일 마주하는 환경에 대한 익숙함 때문에.


하지만 사실 난 느끼고 있었다. '근면'이라는 단어가 표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저변에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전날 3차까지 회식을 마치고 난 다음날이면 오히려 더 일찍 출근하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새벽 6시에 이미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사무실의 모습에서, "오늘 뭐 이렇게 일찍 나왔어."라고 말하는 팀장님의 올라간 입꼬리에서 난 그 신호를 포착할 수 있었다.


당시엔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훗날 조직개발(Organizational Development) 업무를 하면서 그 개념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빙하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물 위로 보이는 부분(A)과 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 부분(B)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를 조직문화에 빗대어 보면, A부분은 기업에서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핵심가치, 사훈, 표어 등과 같은 것들로서 '상징과 인공물(Symbol and Artifacts)'이며, 그 하부에 수면 위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B부분'은 기업 내부에서 암묵적으로 구성원들 간 동의, 합의된 '가치(Value), 행동규범(Code of Conduct)'이다.


선배가 던졌던 출근시각에 대한 질문과 이른 새벽에 출근하는 리더들, 선배들의 모습은 바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하게 작동하는 구성원 간 암묵적으로 합의된 '가치, 행동규범'을 지키려는 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걸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관계없이..)


그 질문을 들은 지도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다. 부엉이형 인간이 새벽형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투했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조직에서 암묵적 '가치, 행동규범'은 너무도 강력한 것이어서 나의 라이프 스타일도 거기에 맞춰 바뀌어왔고, 한창 조직에서 주인의식(!)이 강했던 시절엔 그 가치규범의 전파자 역할도 활발히(!) 했던 기억이 난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19 사태가 벌어지고 갑자기 맞이한 '재택근무'의 경험은 내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을 성실히, 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십여 년의 시간 동안 거의 대부분 평일에 난 늘 새벽같이 일어났고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이른 출근'은 특히, '(타인이 기대하는 시점보다 빠른) 이른 출근'은 때론 내게 뿌듯함을 주기도 했고 조직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심리적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늘 그렇진 않았지만, 이런 감정을 느꼈던 건 분명 사실이다.)


그.런.데.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이동시간이 사라지고(1분 이내) '물리적인 출근'이 '온라인 업무시작'으로 대체되면서 그간 내 안에 깊이 뿌리내렸던 '조직의 가치, 행동규범'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근면'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제 더 이상 소위 '농업적 근면성'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아직도 나는, 우리는 '사무실에서' '근면을 기반으로 한 태도'를 강요받고 있지는 않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렇다면 '근면'은 폐기되어야 할 가치인가? 모두가 외치는 성과주의에 따라 '성과'라는 가치로 대체하면 기존의 '근면'의 가치를 모두 품어 안을 수 있는 것인가?


조금은 무겁기도 한 이런 질문들이 내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면서 '근면'을 갈음할 수 있는 작은 빛 하나를 발견했다.

아직은 완벽히 선명하게 이것이다 라고 명명할 수는 없지만, '자기 주도적 성실'이란 개념을 마음속에서 길어 올려본다.


'근면'의 기본 가치에서 추출해낸 '성실성'을 기본 재료로 하여,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주도성'을 방향으로 삼아, 외적 압력(내면에서 일어나는 외부 시선에 대한 인식을 포함)에서 벗어난 '상태/동태'라고 조작적 정의를 하고 싶다.




'1인 기업*'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의 삶의 궤적을 좇다 보면, 어깨너머로 그분들의 삶을 곁눈질로 보다 보면, 어느새 부러움과 동경의 마음이 가득해진다. 십오 년 넘게 조직인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우주 저너머의) 미지의 세계'이기도 해서 그 '명과 암'을 모두 살펴보긴 어렵다. 다만 그 '밝은 면들'을 보며 나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면 어떨까 하고 막연히 그림을 그려볼 뿐이다. 오늘 출근길에도 그랬다.

(*이 글에서 말하는 ‘1인 기업’은 비단 ‘1인 기업가’ 뿐만 아니라, 개인의 브랜드로 주체성을 갖고 비즈니스/삶을 영위하시는 분들 모두를 일컫는다.)


사진/글 독립한 마케터, 프리에이전트 정혜윤님 인스타그램 @alohayoon



사진/글 김부진님 인스타그램 @bujin_mindful


따사로운 아침의 햇살과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모닝커피의 향연, 가슴 깊이 시원해지는 바람결과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리는 표정을 바라보며 '나도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매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라는 마음의 외침이 또 한 번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쫓기지 않고 나의 시간을 내 의지대로 채워나가는 모습이 말 그대로 아름답게 보였다. 특히, 시간에 쫓기지 않는 듯한 여유로움과 시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은 늘 동경의 첫 번째 이유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조직을 떠나, 단지 1인 기업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런 삶, 시간을 주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조직 구성원으로 일을 해나가느냐, 1인 기업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 오랫동안 내 안에 스며든 시간 사용 습관이 더 핵심 원인이겠구나 싶었다.

'근면'을 모토로 '10분 먼저', '조금 더 빨리'라는 내면의 구호 아래 나를 강박적으로 몰아왔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1인 기업가로 살아가시는 분들 역시 모든 시간을 자신의 뜻대로만 채워가는 건 불가능할 터인데 내가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구나. '시간을 내 뜻대로만 채워갈 수 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시간을 장악하고 있느냐,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 있느냐'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랑의 기쁨,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는 영원에 다름 아니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p185)


현재는 날이 선 칼날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넓이를 가진 안장이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 양방향으로 시간을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슈테판 클라인(p95)


늘 가슴 한편에 품고 다니는 두 문장을 새삼 꺼내본다.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지금, 현재'는 날이 선 칼날이 아니라 안장이어서 거기에 앉아 양방향으로 시간을 바라본다는 것.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살 것도, 과거에 매몰되거나 미래를 막연히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 다시금 되새겨본다.


오랜 기간 내 안에 만들어놓은 '감옥' 안에서 나를 꺼내 줘야겠다. 조직생활 가운데 차츰차츰 물든 시간에 대한 관념, 근면에 대한 잘못된 관습을 벗어버려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1인 기업가로 살아가는 분들의 삶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그분들이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건' (또는 그렇게 보이는 건) 시간을,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관리하고 채워가기 때문이 아닐까? 그 밑바탕에는 시간의 여유를 만들어가는 시선과 작은 습관들이 모여있지 않을까? 거기에 자신의 일의 영역에서 '자기 주도적 성실'을 모토로 살고 있지 않을까? 이런 가정들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진정 원하고 추구했던 삶을 가꿔가기란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른다.

(좀 더 자세한 그분들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유레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내가 품고 살아가야 할 삶의 기치, 방향성을 하나 더 찾았다. '자기 주도적 성실'


아직은 개념적이고 막연하기도 하지만, 일상의 내 삶에서, 조직 안팎에서 일하면서 작은 것부터 사부작사부작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봐야겠다.


그리고 그에 앞서, 시간을 바라볼 때, 시간을 채워갈 때에도 의식적으로(!) 여유를 가져야겠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10분 먼저가 아닌, 10분 나중에'를 외치면서.



우리, 12시 말고 12시 10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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