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처음 해본 말
7 곱하기 3은 21.
스물 하루 동안의 휴가를 앞두고 있다. 내 인생 최장 기간 휴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사회 초년생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덧 16년 전이고, 어찌하다 보니 난 한 회사에서 만 15년을 근무했다.
요즘처럼 ‘퇴직’, ‘이직’이란 키워드가 핫한 시절에 장기근속은 예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주변을 보면 퇴직하고 새로운 준비를 하는 기간이나 이직을 앞두고 갖는 ‘나만의 방학’을 길게 가지면서 오랜 기간 여행을 다니시는 분들도 꽤 많은데 내겐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밋밋한 15년을 보낸 건 아니다. 크게 다섯 번의 본부 이동을 하면서 나름 이직에 준하는 변화를 겪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건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쓰다 보니 약간 서글퍼지기도 하는데..) 긴 삼 주간의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LBB(Leadership Build-up Break)라는 이름의 휴가인데, 직위 승급한 해에 사무실을 떠나 최장 삼 주의 휴가를 보내며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라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올해부터 새롭게 생긴 휴가제도의 혜택을 톡톡히 받게 되는 셈이다.
1월만 해도 내 마음속 휴가지는 ‘발리’였다.
인스타그램에서 발리 가면 다닐 만한 요가 스튜디오도 찾아보고 아이가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여름 캠프 프로그램도 들여다보면서 흐뭇한 꿈을 꾸었다. 서점 가서 발리 여행책도 한 권 데려와서 찬찬히 넘겨보기도 했다. 그런데 코로나 19 여파로 ‘발리 3주 살기’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앞으로 조직 생활하면서는 다시 갖기 힘들 긴 휴가를 내고 제일 가고 싶었던 곳에서 보내고 싶었는데 허망했다. 그래도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음 주나 다다음주가 되면 지난 연말에 주문을 넣은 자동차가 출고될 예정이다. 작년 말부터 단일 차종으로는 제일 많이 팔리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사려다 보니 거의 반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여름휴가 전에 차가 나온다니 다행이다.
그래, 자동차를 타고 남쪽까지 내려가서 배 타고 제주도를 가자!
여름에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아내가 시험 전에 집중해서 공부 마무리를 할 수 있게 도와주려면 우리집 큰 고객 ‘딸’을 내가 모시고 다른 곳을 여행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계획이다. 세 가족이 모두 함께 가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인걸 아내와 난 알고 있다.
지도 앱을 켜놓고 어떤 경로로 가볼까 생각도 해보고 초록창에 ‘배 타고 제주도 가기’도 찾아봤다. 그러다가 문득 나도 요즘 세대처럼 유튜브로 검색해봐야겠다 하며 찾아보는데 웬걸? 정말 세세하게 기록된 영상과 설명을 보니 경로 결정하기가 너무 쉬웠다.
원래 막연한 생각으로는 여수나 목포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제주도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는 부산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찾아보니 완도항 외엔 출항하는 제주행 배들이 새벽이나 늦은 밤에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아직 열한 살 딸을 나 혼자 데리고 움직이는 상황을 상상하니 낮시간에 움직일 수 있는 배편을 찾아보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완도 여객터미널에서 배 타고 제주도로 가는 경로로 결정을 했다.
거의 두 달 뒤에 출발하는 여정이지만 미리 배편도 예매해놓고 숙소도 예약해놔야 동선상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즐거운 여행을 꿈꾸는 것도 역시 체계적 분석력과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속으로 외치면서 숙소부터 한 곳씩 한 곳씩 예약을 하는 중이다.(범생이 기질이 작동하는 걸까?ㅋㅋ)
나 혼자라면 대략 일정만 짜 놓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보낼 텐데 아무래도 딸린 식구가 있다 보니 잘 곳, 갈 곳은 미리 정해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든든한 아빠 되기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까? ㅎㅎ
일상은 업무로 분주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여행이 시작되었다. 마음속 그루브를 타면서 오늘도 에어비앤비 검색을 시작한다.
이미 여행은 시작되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보내며 생각과 감정을 찬찬히 기록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