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처럼 쌓여가는 일상의 history
띵동, 띵동!
현관 벨이 울린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코 끝에 갖다 대곤 열한 살 딸이랑 아내를 향해 “쉿!”하고 외친다. 2분쯤 지났을까 엘리베이터 문을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영화 007 시리즈에서 나올 법한 모습으로 비밀 물건을 접선 장소에서 몰래 가져오듯이 종이백 한 꾸러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집 앞 현관에 놓아주세요. 오시면 벨만 눌러주세요.
라고 배달앱에 썼던 요청사항이 적혀있는 영수증이 팔랑거렸다.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 투명 플라스틱 용기에는 배달원의 급한 마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초밥들이 한쪽으로 살짝 몰려있었다. 코로나 19 여파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그는 생활인으로서 배달원이 느낄 삶의 무게를 스치듯 생각했다. 특초밥 한 세트와 연어/소고기 초밥 한 세트를 먼저 식탁 위에 꺼내놓고 동그란 통에 하나씩 들어있는 메밀 소바 면이랑 국물도 꺼내놓았다. 따끈한 미소된장국이랑 고추냉이, 락교까지 식탁 위에 올려놓으니 즐겨가던 초밥집이 그리 부럽지 않았다.
늘 그렇듯 초밥 메뉴의 우선 선택권은 딸에게 있다. 언젠가부터 연어 초밥이 맛있다며 초밥 먹으러 갈 때면 늘 연어 초밥을 골랐다. 연어 초밥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초밥집을 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딸은 연어 초밥을 먹고 싶다고 했고 배달앱 장바구니에도 직접 연어 초밥을 담았다. 요즘 그녀의 두 번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소고기 초밥과 함께.
돌아보면 처음 초밥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는 참치 초밥, 광어 초밥을 즐겨 먹었다. 참치 회, 광어회를 먹기 시작하다 보니 아무래도 익숙한 식재료였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참치 초밥, 광어 초밥이 메뉴로 나오면 손이 잘 안 간다. 라면만 먹고 달리기를 했던 어느 육상 선수가 메달을 따고 나서부턴 라면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던데 그거랑 비슷한 심정이랄까?
아까부터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사람이 있으니 아내다. "어서 드세요, 많이 드세요." 하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지 마는지 젓가락만 들고 초밥을 입에 넣을 생각을 안 한다. 딸아이가 싫어하는 마요네즈 양파 토핑을 걷어내고 아이가 먹는 모습만 바라본다. “먼저 드세요, 드세요.”하며 남편이랑 아이가 먼저 먹길 바라는 눈치다. 그 말과 그 손짓에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어미의 마음은 다 똑같은 걸까?
요즘 소고기 초밥에 강하게 끌리는 딸은 1순위 연어 초밥을 옆에 두고 소고기 초밥 다섯 개를 뚝딱 해치웠다. 평소 밥알 개수를 세며 아침을 먹는 딸은 아무래도 옆집 아이인가 보다 했다. "맛있다, 맛있어." 하며 초밥을 하나씩 하나씩 먹는 딸을 보며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벌이를 담당하는 가장의 어깨가 조금은 더 무거워지는 것도 함께 느꼈다.
광어, 참치, 소고기, 장어가 얹혀 있는 작은 밥덩이들을 먹고 나니 어느덧 포만감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그 배부름은 초밥 때문이라기보다는 처남이 보내온 빵을 먹어서인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배부르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그는 배부르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사실 그런 습관을 갖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작년 말에 우연히 시작한 키토식(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시작하면서부터 배부르면 바로 멈추는 훈련의 결과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그런 결단을 할 수 있는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웬일로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연어 초밥이 네 개나 남았다. 문득 그는 참치 초밥이랑 광어 초밥과 소원해진 자신의 모습을 겹치듯이 보았다.
‘초밥도, 사람도 첫사랑은 첫사랑일 뿐이지.’
순간 떠오른 문장에 그는 자기만 아는 듯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더 드세요.” 아내가 말했다. “배불러서 더 못 먹어요.” 그는 확실하게 자기 의지를 밝히려고 쓰던 젓가락과 접시를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그보다 명징한 자기표현은 없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그제야 남은 연어 초밥을 하나씩 먹으며 아내는 말했다. “나도 배부른데.. 에이, 안 되겠다, 나라도 먹어야겠다.”
초밥을 본격적으로 즐겨먹기 시작했던 대학생 시절,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여자 친구 만나거든 너무 일찍부터 초밥이나 회 사주지 마라.
한번 먹기 시작하면 초밥이나 회만 먹자고 할 테니까. 껄껄껄.”
그날의 우스갯소리를, 아버지의 표정과 목소리를 그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여자 친구'라는 단어가 아버지와의 대화 가운데 처음으로 등장한 날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지금의 아내랑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어느 날, 강원도 속초까지 드라이브를 떠났고, 배부르도록 초밥이랑 회를 먹었다. 아내는 이십 년 가까이 된 그 이야기를 지금도 곧잘 하곤 한다. 그때 참 맛있었다고.
지금도 초밥을 보면 그날 아버지의 우스갯소리와 여자 친구와의 속초 여행을 그는 떠올린다. 자기 딸에게 초밥을 계속 사줄 사람의 모습을 궁금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