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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인생여행을 함께한 자동차들

그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지층처럼 쌓여간다

by 인생여행자 정연


베르나


‘나와 내 가족 첫차’란 카피로 알려진 차. 사실 이 자동차는 내가 마련한 첫 차는 아니었다. 동서남북 서울 곳곳과 분당까지 과외를 열심히 뛰어다니던 여자 친구가 이동의 편의성을 위해 중고로 산 차였다. 경차 신차보다는 소형차 중고가 안전상 더 나을 거라는 내 조언을 받아들여 선택한 차. 당시 여자 친구가 부모님께 차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릴 때 첫 번째로 들었던 이유는 과외하러 다닐 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문에 따르면 그녀의 마음속엔 당시 경기도 파주에서 군 생활하고 있던 남자 친구 면회 갈 때 타고 가려고 했던 목적이 더 컸다고 한다. (Hurray~!)


그렇게 거의 매주 주말마다 군부대로 면회 왔던 그 차는 결혼 후 우리 가족의 첫 차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약 4년을 더 탔으니 중고차로 온 그 아이는 우리 커플을 위해 충실히 그 역할을 다했다. 지금은 남아메리카 어느 도시에서 달리고 있을지 모를 그 아이가 문득 보고 싶다.



쏘나타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지던 2009년 12월 마지막 주 어느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눈길을 헤치며 자동차 판매지점에 도착해 차키를 받아 들고, 눈 덮인 언덕길을 올라 차를 몰고 집까지 오는 길은 참 멀고도 멀었다. 그래도 참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기억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꾸리고 내 자력으로 마련한 첫 차, 이듬해 태어날 아이를 안전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마차를 마련했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꼈다.


‘가슴이 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직 어리거나, 이미 심장이 멎었거나.’라는 광고 문구에 가슴이 떨렸던 ‘제네시스 쿠페’를 마음속 저편으로 보내고 산 차였다. 날렵한 디자인과 우수한 성능에 위안을 삼으며 멋스러운 쿠페 대신, 가장으로서 ‘가족의 차’를 선택한 셈이었다.


펄이 들어가 더 반짝반짝했던 하얀색 외장 칼라는 시간과 함께 빛이 바래며 밋밋해지고 탄력 넘치던 시트의 쿠션감도 많이 사라졌지만 그 시간의 길이만큼 젖먹이 아이는 어느덧 열한 살 초등학생으로 훌쩍 자랐다. 오랜 시간 우리집 메인 패밀리카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이 녀석을 지켜보노라면 지나간 십 년 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큰 사고 없이 함께 해온 이 아이에게 감사할 뿐이다.



투싼


생산 사업장에서 근무해보겠다고 야심 차게 내려간 충남 아산에서 생애 처음으로 혼자 생활하는 시간을 가졌다. 업무를 마치고 회사 셔틀버스를 타고 생활관이라고 불리는 숙소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나면 작지만 나만의 공간에 홀로 있는 그 기분은 늘 생경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 생활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동료들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스쳐가는 듯했고 나의 관심은 일과 후 평일 저녁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에 있었다. 한 권 한 권 가져다 놓은 책들을 숙소 책상에 쌓아놓고 읽기도 하고, 생활관 건너편에 있는 문화관 건물 체육관에서 운동도 틈틈이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뭔가 허전함은 더해갔고 사무실과 생활관을 오가는 생활에 무료함이 커졌다. 매일 저녁 딸이랑 영상통화를 하면서 아빠의 존재를 알리고 교감하는 것 외에,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 나만을 위한 활동이 필요했다. 누군가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거라 했듯이, 물리적으로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생겼다고 해서 진정 나의 공간과 시간을 소유하게 됨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러던 중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게 바로 요가다.


아산으로 근무지 이동이 확정될 때부터 아산, 천안지역에 있는 요가 스튜디오를 찾아봤지만 그룹 클래스에 남자 회원은 받지 않는다는 답을 듣고서 접었던 요가를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찾던 중에 경기도 평택에 남자 회원도 받는, 게다가 전에 참여했던 요가 클래스들이랑 비슷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멋진 스튜디오를 찾게 되었다. 다만 고민은 쏘나타는 집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충남 아산에서 경기도 평택까지 가려면 차가 필요하다는 것. 고민 끝에 중고차 한 대를 마련했다. 아산, 평택 지역에 산업단지들이 여럿 있어서 대형 트럭들이 많이 다니다 보니 (그것도 엄청 빠른 속도로!) 세단보다는 좀 더 안전한 SUV를 사야겠다 마음먹었고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아이가 바로 투싼이다.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뻥하고 시원하게 날려주고 내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도와주었던 그 요가 수업 뒤에 숨은 일등 공신이었다.



그랜져 하이브리드


‘2020 성공에 관하여’라는 카피부터 마음을 파고드는 광고 영상까지,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 컨셉과 타깃이 딱 나네 라는 생각이 든 차다. (찾아보니 Young Forty가 타깃이 맞았다는. ㅎㅎ) 사실 그랜져 IG 초기 모델을 타고 다니시는 분들을 회사에서 너무 많이 본터라 그랜져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져 있었다. 다음 차를 산다면 싼타페를 살까 했는데 그마저도 직접 타보면서 느낀 소감은 내 취향은 아니라는 거. 그러던 와중에 예전의 로망 ‘제네시스 쿠페’랑 겹치듯 데자뷔를 일으킨 차가 있었으니 ‘제네시스 G70’이었다. 끌리는 전면부부터 낮게 깔린 차체와 옆선, 차량 안팎의 칼라는 오랜만에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제네시스 전시장에 미리 예약하고 가서 시승도 해보고 어떤 트림으로 할지까지 마음속으로는 거의 다 결정하기까지 이르렀다. ‘우리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 아이니까 뒷좌석 천장이 낮더라도 괜찮아, 지금이 이런 스포티한 고급 세단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라는 내면의 외침이 너무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던 중 ‘그랜져 IG 페이스리프트’가 나왔다. 디자인 측면에서 전혀 새로운 얼굴로 다가온 아이, 제네시스 G70과 견져볼 때 비슷한 예산으로 가족들과 내가 다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선택지였다. 마치 10년 전에 제네시스 쿠페와 쏘나타를 두고 고민했던 것처럼 제네시스 G70과 그랜져를 두고 또 한 번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이번에도 ‘오롯이 나만을 위한’ 차를 선택하진 못했다. 하지만 10년 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마음을 정리하고 그랜져 하이브리드를 택했다. 그 사이 바뀐 게 있다면 내 안에서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커졌다는 것, 그리고 나의 성공의 정의가 달려졌다는 것. 그 마음을 참 잘 담은 광고 영상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연신 지어본다.


https://youtu.be/2R7CLHmFG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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