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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독을 푸는 나만의 비법

일상 속 작은 여행의 맛

by 인생여행자 정연
여독
명사.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피로나 병
- 표준국어대사전 -


처음 이 단어를 접했던 건 아마도 중학교 때 국어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으로 늘 바쁘셨고 나 역시 학업에 몰두(?)했던터라 기억에 남는 여행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독’은 내게 꽤 생경한 단어였다. 남들 다 간다던 유럽 배낭여행도 대학생활 막바지에 했으니 여독을 느낀다는 건 호사였다.


이번 제주 여행을 마치며 공항으로 가는 길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지난번 3주 여행길에 딸아이가 친구로 사귄 아이의 아빠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안전하게 돌아가시고 여독 잘 푸세요.”라는 그의 인사에 따듯한 감사를 느꼈다. 동시에 ‘여독’의 존재를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여행 다음날, 평소처럼 주문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면서 언택트 시대에 맞게 조용히 책이나 봐야겠다 싶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출근길 느꼈던 바람결을 되뇌어봤다. 휴가 후 출근의 압박감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지 모를 여독을 알아차리고 풀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단 생각이 산들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점심시간에 양재천을 따라 산책을 해봐야겠다.


그렇게 이십 분을 걸었다. 예전에 회사 동기가 알려준 카페에 도착해 아이스라떼 한잔을 주문해서 마시는데, 어제까지의 여행이 계속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는 동네를 지나다 보니 시골로 순간 이동한 것 같은 정서적 만족감은 점심 산책을 더 여행처럼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서점결’이란 온라인 독립서점의 팝업 스토어를 들렀던 건 큰 행운이었다. 멋진 그림책 한 권을 만났고 책방지기와 대화도 나누고 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덤으로 선물 받았다.


여독 해독제 - 아이스라떼와 그림책


늘 하던 출근이지만 휴가 다음 출근 발걸음은 더 무거운 법.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사실이 그러한 걸. 어려운 발걸음을 한 나를, 업무 안에 파묻혀 있던 내 여독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슬며시 새삼 바라보게 된 여독을 작은 여행으로 풀어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인생은 여행이다. 인생의 여독도 분명 있을 텐데 잠깐 쉼표를 찍고 또 다른 인생여행으로 그 여독을 풀어가는 내가 되길 바란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나팔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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