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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에 대하여

내 삶을 내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

by 인생여행자 정연


[표지 사진 : 요즘 넷플릭스에서 푹 빠져서 보는 ‘삼국지 극장판’ 중 삼고초려하는 유비를 맞이한 ‘제갈공명’의 모습 그리고 그의 수염]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수염이었다. 젊은 시절에 이광수의 수필을 읽다가 한자로 쓰인 ‘수염’을 보고 놀랐다.
사람 모습을 지칭하는 아주 보통의 이름인데 한자말이었다니.
- 강창래, 위반하는 글쓰기 중에서 -


수염이 한자말이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사람의 모습을 지칭하는 아주 보통의 이름’인데 의외로 순 우리말이 아니었구나. 사실 별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부쩍 관심을 갖게 된 수염. 생각해보니 수염의 내 마음속 자리가 바뀌었다.

수염은 늘 ‘깎는’ 대상이었는데 지난 3주의 여행을 보내고 나서 내 일부로 자리 잡았다. 수염 기르기 전 아빠의 모습이 잘 안 떠오르는다는 딸의 말이 수염의 위상을 입증하는 것만 같다.


사실 작정하고 수염을 길렀던 건 아니었다. 여행 첫날 작은 여행가방 하나만 들고 숙소에 들어왔는데 수염을 깎으려고 면도기를 찾다가 차 트렁크 안 큰 여행가방에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만 해도 다음날 깎일 얼굴에 난 털에 불과했다. 그렇게 이틀 사흘 보내다 보니 3주간 긴 여행 중에 굳이 면도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여행 기간 동안은 ‘야인’처럼 살다가 다시 출근하기 전날 깔끔하게 ‘도시 남자’로 변신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고 보름이 되었다. 새로운 변화는, 새로운 도전은 늘 ‘작게’ 시작된다. 문득 ‘수염도 기르고 헤어 스타일도 바꿔볼까?’ 스치는 생각을 뜰채로 담아 내 마음에 넣었다. 여행지 제주도에 있는 바버샵을 초록창에서 검색하고 평이 좋은 곳을 예약하고 찾아갔다.


스타일 변신을 시도한다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고 전문가로서 제안해주는 담당 바버의 이야기에 신뢰가 갔다. 그에게 오랜 기간 유지해온 내 머리카락 스타일과 송송 솟아오른 수염을 맡겼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믿음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벗어두었던 안경을 쓰고 거울을 바라보는데 내가 봐도 다른 사람 같은 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 스스로도 아직 낯선 그 모습이 금세 마음에 들었다.


딸이 자연스럽게 찍어준 사진 몇 컷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가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잘 어울린다. 수염 계속 길러라. 수염 고고.’ 등의 댓글이 달렸다. 나중 일이지만 직접 만나본 지인들은 한결 같이 ‘작가 같다. 예술가 같다.’ 등등 ‘창작자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콘텐츠를 만들어 다른 이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가득한데 겉모습이나마 그렇게 보인다는 왠지 반가웠다.


아침에 눈을 뜨고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치는 얼굴을 볼 때마다 새로운 내 모습에 나 역시 조금씩 조금씩 적응해간다. 그러면서 새삼 느낀다. ‘내면이 바깥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내가 만든 겉모습이 내 내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린다.


언제 다시 수염을 밀고 ‘전형적인 회사원’의 모습으로 돌아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대로 살아가겠다는 소중한 의지를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나 자신과 이 시간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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