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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행

by 인생여행자 정연

끼니마다 마른 목 너머로 비아그라를 삼켜야 했다. 페이스북 피드에 뜬 두 장의 사진을 힐끔 바라볼 때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우연히 만난 사진이 계기가 되어 이런 경험을 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초록색으로 깊게 물든 너른 초원 풍경과 하얀 설산 아래 펼쳐진 에메랄드빛 호수 정경 사진에 넋이 나간 듯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댓글을 쓰고 있었다. “남자라서 가능할지는 모르겠는데, 괜찮다면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페친, 인친’이라 불리는 인간관계는 참 오묘해서 친한 척할 수 있는 친구 같다가도 교류가 뜸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 관계 없는 남이 되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페이스북 친구는 친구라기보다는 온라인상 알게 된 지인 정도가 맞겠다 싶다. 종종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공감의 댓글을 몇 번 나눈 정도의 페친이 올린 ‘여행 동행’을 모집한다는 글을 봤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좋아요 버튼을 누르거나 하트 버튼을 누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그날 난 무엇에 홀린 듯이 참여 의사를 밝히는 댓글까지 쓰고 있었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그녀를 알게 된 건 우리 회사 특강에 모셨던 교수님 페북을 통해서였다. 우연과 우연이 만나 ‘페친’이 되어 간간이 글을 보던 게 전부였는데 덜컥 여행 동행 신청을 하다니 그런 행동을 한 스스로가 생경했다. 게다가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미혼 여성이었고 난 유치원생 딸을 둔 기혼 남성이었다. 단둘이 가는 여행 신청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금기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만 같았다.


여행 동행 모집이 끝나고 ‘낙점’된 우리들은 서로 인사도 나눌 겸 여행 계획도 공유받을 겸 강남역 치킨집에 모였다. 이번 여행을 기획한 그녀를 포함해 남자 둘, 여자 둘이 서로 ‘님 호칭’을 쓰며 치맥을 먹는 자리란 꽤 어색해서 나를 입증하고 전시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른 두 명은 그녀와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이었다. 한 명은 한 살 위 회사 여자 선배였고 다른 한 명은 UI/UX 공부를 하며 알게 된 한 살 아래 남자 후배였다. 그야말로 페친으로 지내다가 그날 얼굴을 처음 본 나는 굳이 친분 서열을 매기자면 꼴찌였다.


‘우리’가 그렇게 둘러앉아 맥주를 두 번째로 마셨던 건 경유지였던 칭다오 공항 안 음식점이었다. 한국에선 늘 같은 한 종류의 칭다오 맥주를 마셨는데 칭다오 맥주의 본고장답게 참 다양한 칭다오 맥주가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종류별로 마셔보자며 점원에게 메뉴판 속 맥주 그림을 가리켰다. 이 자리를 기념하겠다며 유리잔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 해맑은 얼굴로 사진도 찍었지만 어쩐지 불편한 게 있었다. 그때만 해도 ‘님 호칭’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로선 앞으로 여드레 동안 이렇게 애매한 호칭과 말 어미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 중심으로 편한 호칭과 격식을 차린 호칭이 뒤섞이다 보니 뭔가 ‘정리’를 해야 할 것만 같을 필요를 느꼈다. 편하게 말하자고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고 화답했다. 그렇게 나는 ‘오빠, 형’이 되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쓰촨성 야딩 풍경구’라는 곳이었다. 중국 쓰촨의 성도인 ‘청두’에서 차로 3일간 800㎞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머나먼 미지의 땅이다. 해발 5,000m에 있는 에메랄드빛 호수 ‘우유해’를 보러 가기 위해 여행 전부터 준비할 게 많았다. 첫 번째로 준비한 건 중국 비자가 아니라 ‘처방전’이었다. 이름부터 생소한 아세타졸아미드, 덱사메타손, 실데나필 열흘 치 약 처방명세 사이에 비아그라가 있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발기부전치료제를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지만, 청두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여행을 마칠 때까지 매 끼니 약 한 봉지씩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고산병 걸리지 않으려면 약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비아그라 짝퉁 ‘누리그라’를 처방받아온 ‘남자 동생’과는 여행 내내 같은 방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둘, 남자 둘 여행에 합리적인 숙박은 2인 1실이다 보니 그게 자연스러웠다. 알고 보니 이 남자 동생은 우리 회사 연구소 소속 연구원이었다. 워낙 회사가 크고 일하는 직원들이 많다 보니 서로 타인으로 스쳐 지나가게 되곤 하는데 이렇게 한방 쓰는 사이가 되니 그 연이 꽤 크게 다가왔다. 회사 얘기, 팀 얘기, 리더 얘기를 나누다가 우린 어느덧 장래 희망과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고 있었다. 대화는 그렇게 새벽 한두 시까지 이어졌고 밤의 밀도처럼 관계의 밀도도 깊어져 갔다.


우리가 내달린 길은 ‘318국도’라는 길이었는데, 처음 도착한 청두에서 시작해서 야딩 풍경구까지 가로지르는 서울·부산 왕복 거리에 해당하는 꽤 긴 국도였다. 초반부에 마주한 길은 포장상태도 좋지 않고 건설자재를 가득 실은 과적 트럭들이 무자비하게 추월하는 길이어서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물론 빠오처라고 해서 중국인 기사가 운전하는 승합차를 타고 있어서 운전에 대한 직접적인 부담은 없었지만 ‘목숨은 하나이지 않은가?’ 우습지만 진지한 생각도 들었던 터였다. 가이드를 자처한 그녀에게 이 길로 계속 가도 괜찮냐는 우려 섞인 우리 질문에, 능숙한 중국어로 기사랑 얘기를 나누더니 조금만 더 참고 가면 괜찮을 것이란 답을 받았다. 얼마 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괜찮다기보다는 놀라 쓰러질 만했다. 해발 3,000m에 드넓게 펼쳐진 고산지대 초원에서 광고에서만 봤던 블랙 야크 무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으니 말이다.


초록빛 초원 배경에 빨강 점퍼를 입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깊은 믿음을 발견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해왔다는 점, 중국 지역전문가로 1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 사회문화에 밝고 중국어도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의지와 나를 따르라는 자세에 매혹되었다. 그때부터 난 ‘오빠나 형’의 자리를 마음에서 내려놓았다.


맏아들, 장손으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내 어깨엔 책임이란 게 늘 서려 있었다. 할머니께선 늘 ‘우리 손주, 우리 장손자’라며 나를 아껴주셨지만, 거기에 부합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이 그림자처럼 공존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회장이라는 감투를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앞에 나서는 일,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일도 많아졌다. 외향성을 가진 리더십의 선호가 초등학교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내성적이고 내향적인 성향으로 태어났지만 살아오면서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 속에서 섬세하고 내밀한 감정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곤 했다. 그런 나였기에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은 남성으로서 이번 여행에서도 이끌어야 하고 책임져야 하고 ‘오빠 노릇, 형 노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있었다.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 무의식적 강박과는 달리, 이 여행에서 난 ‘손 많이 가는 오빠’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 한번은 리탕이라는 시골에 있는 작은 호텔에 머물렀는데 방이 너무 추워서 가져갔던 두툼한 옷을 다 껴입고 잤는데 그런데도 너무 추워서 얼굴이 돌아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 투덜거리며 여자방 멤버들에게 이 얘길 했더니 춥긴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며 우리 방에 와서 둘러보곤 커튼을 제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커튼 뒤 창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황당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또 한번은 따오청이라는 도시에서 택시를 탔는데 핸드폰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여행 중 찍었던 사진을 모두 날릴 뻔했다. 그때도 빨강 점퍼의 그녀가 그 택시를 수소문해서 핸드폰을 되찾았다. 보통 실수도 잘 안 하고 때론 주도면밀하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꼼꼼하게 일상의 일들을 처리해나가는 나란 사람인데 나사 하나 빠진 사람 같은 행동들을 연이어서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던 건 그 여드레 간 여행 하는 동안 그 어떤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는 거다. ‘손 많이 가는 오빠’라고 엷은 놀림을 받을 때도, 이번 여행에서 오빠가 유일하게 잘한 건 휴게소에서 맛있는 대추를 사 온 거라고 동생들이 히죽 될 때에도 난 즐겁고 행복했다. 남자답게, 맏아들답게, 장손답게, 형답게, 오빠답게, 선배답게, 리더답게 살아야 한다는 무거운 갑옷을 훌훌 벗어버리며 내 마음의 짐도 함께 내려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가 참 달랐다.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여행이라는 점, 가족 안에서의 역할을 더 충실히 해야 할 것만 같은 추석 연휴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여행을 왔다는 점 역시 내겐 도전이었지만 변화의 시작이었고 내려놓음의 실천이었다.


해발 6,000m 눈부시도록 하얀 설산에서 흘러내려 온 물이 가득 담긴 에메랄드빛 호수를 바라본 시간은 고작 삼십 분 남짓이었다. 여기까지 오려고 비행기를 두 번 타고 사흘 간 800㎞를 달려서 네 시간 트래킹 끝에 도착한 목적지치고는 참 짧은 시간이었다. 고산지대에 몰아치는 거센 비바람에 손이 거의 얼 정도여서 우리 일행은 기념 촬영을 부리나케 마치고 어렵게 올라온 그 길을 재촉해서 내려갔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난 지금, 이제는 그 무거운 사회적 갑옷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루하루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게 삶이고 여행인 까닭이다.



해발 5,000m 에메랄드빛 호수 ‘우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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