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을 쳐도 좋아, 물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바나나우유 하나 마실 요량으로 아빠 손을 잡고 공중목욕탕에 다니던 시절, 목욕하러 가는 낙이 하나 더 있다면 온탕에서 동생이랑 자맥질하며 물놀이한 게 아닌가 싶다.
수영도 못하던 내가 겁 없이 물장구치고 놀았던 건, 적당히 따뜻한 물에서 오는 평화로움과 여차하면 물에 빠지지 않게 일어설 수 있다는 안전감이 큰 몫을 했던 것도 같다.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다시 성인으로 성장해가면서 마주하는 물도 변해갔다. 목욕탕에서 계곡으로, 강으로, 바다로.
익숙한 환경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찰랑거리는 파도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할 때가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찰싹거리는 파도에도 놀라 발 담그기도 어려웠던 시절, 나는 유약했고 연약했다.
저 멀리 보이는 깊은 바다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작은 파도에 혼비백산하던 작은 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있다.
다그치기만 했던 그 아이의 축 처진 어깨가 어느 날부터인가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아줬다, 깊이.
마음에 힘을 얻었는지 이젠 물장구도 치고 제법 헤엄도 친다. 아직도 서툴다. 그래도 이제 놀라진 않는다. ‘파도가 밀려오면 무심코 파도를 타야지.’하며 너스레도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