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여행답게 만들어주는 세 가지
여행 중인데 더 ‘진하게’ 여행하고 싶다.
오늘 글은 이 문장에서 시작한다.
여행.
명사)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님.
유람.
명사) 아름다운 경치나 이름난 장소를 돌아다니며 구경함.
객지.
명사) 자기 집을 멀리 떠나 임시로 있는 곳.
사전 뜻풀이를 합쳐서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결국 여행이란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임시로 거처를 정하고, 아름다운 경치나 이름난 장소를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집을 떠났고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한 임시 거처에 머물며,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 산과 들의 모습도 보고, 잘 알려진 뮤지엄과 카페, 맛집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으니, 사전적 정의에 따라 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마음에 스며드는 허전함과 함께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나는 진정 여행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곳을 SNS에서 보거나 직접 추천을 받으며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갈곳 목록에 적어둔다. 가보고 둘러보고 마셔보고 먹어본다. 함께 하는 이와 대화하고 때론 고요히 음악에만 몸을 맡긴 채 멍 때리기도 한다. 경험과 생각 그리고 느낌을 사진과 글로 기록도 하면서.
분명 여행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여행하는 나를 어떻게 자각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여행을 확신할 것인가?
완벽해 보이는 빠알간 일출과 일몰, 수려한 산의 모습과 힘차게 부서지는 파도에서 난 여행을 맛본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몸으로 만나온 여행의 경험은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았다. 부족하고 아쉽고 때론 힘들었다.
이번 제주 여행 둘째 날, ‘느슨하고 자유롭게’ 북클럽 리더 소현님이 추천해준 ‘아르떼 뮤지엄’을 찾았다. 밖에서 봤을 땐 여느 전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제일 처음 마주한 공간에 들어서면서부터 ‘다름’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빛과 소리를 이용해 현실감을 높인 디지털 아트 작품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상적인 꽃밭을 거니는 듯, 사파리를 산책하는 듯, 별 사이를 노니는 듯 한량처럼, 나그네처럼 그 공간에 머물렀다.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서있기도, 쏟아지는 폭포 앞에서 온몸을 활짝 펼쳐내기도 했다.
좋아하는 미술작품들이 거대한 벽면을 가득 수놓는 장관을 보며 흘러나오는 클래식에 깊은 감흥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제주 풍광을 담은 미디어 작품’을 봤을 때의 전율이 잊히지 않는다. 애월 바닷가에서 볼 법한 매혹적인 해넘이, 성산일출봉의 아름다운 장관, 제주의 나무와 산은 ‘내가 이런 걸 보러 제주에 왔는데!’라는 마음의 소리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문득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가을 하도리에서 장엄한 일출도 봤고 재작년엔 금능해변에서 빠져들듯한 일몰도 온몸으로 바라봤다. 그럼에도 이번에 아르떼 뮤지엄에서 디지털 아트 작품으로 만나본 일출과 일몰처럼 완벽하게(?) 아름답진 않았다.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걸까?
먼저,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캔버스가 현실적인 흠결이 있었다. 파도에 밀려온 부유물로 지저분해 보이기도 했고 불청객 어선이 멋진 장관의 고요함을 깨기도 했다.
다음으로, 멋진 광경을 바라보는 나의 몸의 상태가 달랐다. 일출을 보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약간은 졸린 상태에서 해돋이를 보다 보니 시차 적응하듯 머리가 멍했다. 일몰을 바라볼 때에는 오랜 시간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다 보니 어서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그러다 보니 멋진 풍광을 만끽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디지털 아트 작품을 볼 때에는 완벽한 심미성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시장 실내는 따뜻했고, 작품에 걸맞은 은은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바로 내 눈 앞에서 보기 좋은 각도로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떤 오점도 불편함도 없이 ‘지고의 아름다움’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디지털 기술의 빠른 발전 덕분에 디지털 아트 작품의 수준도 눈부신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디지털 트윈’ 기술이 보편화되면 예술 영역에서도 진본과 복제본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디지털 판본이 원본과 같아질 것이다. 현실적인 제약도 뛰어넘을 수 있기에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난 접근성을 지닌 체험을 선사할 것이다.
비단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오감을 기반으로 접하는 ‘여행 경험’ 역시 새로이 정의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구경하는 것이 자신의 여행 경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몸을 움직이는 수고스러운 여행’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자극의 원천이 고도로 디지털화되어 ‘나의 공간’에서도 제주의 바다를, 인터라켄의 설경을 마치 직접 보는 것처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여행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앞서 살펴본 사전적 정의에서 나온 것처럼 두루 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여행일까?
보고 듣는 여행이 아니라, 먹는 여행 ‘식도락 여행’을 떠올리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각 지역 유명 음식점에서 직접 먹는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면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역시 현지 맛을 따라갈 수 없다는 간증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웬만한 지역 맛집 체인이 서울에도 있고, 세계 요리도 지하철 타고 가면 대부분 쉽게 만날 수 있다. 다소 급진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식도락, 먹는 행위 역시 여행의 본질적 요소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보고 듣는 것, 맛보는 것도 아니라면 여행에서 우리가 ‘진정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감 기준으로 보면, 이제 남은 건 후각과 촉각이다. 시골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나무 땔 때의 내음, 맨발로 명사십리 하얀 모래를 밟을 때의 감촉은 아직까지 복제하거나 흉내내기 어렵다.
그러면 후각과 촉각만이 여행에 남겨진 본질적 요소일까? 그렇다고 말한다면 분절적 분석의 오류일 수밖에 없으리라.
아르떼 뮤지엄에서 만난 제주 풍광을 담은 디지털 아트 작품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완벽에 가까운 그 모습들을 대형 화면으로 접하면서 그간 보고 싶던 장관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해온 나로선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생경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심긴 여행의 이데아가 디지털로 구현되어 보여질 때 만족했지만 동시에 허탈했다.
그렇다면 내가 좇는 여행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여행의 본질을 논하기엔 내 경험과 지식이 미천하다.)
첫 번째는 ‘단절’이다. 나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의 단절, 의무와 책임의 단절을 말한다. 얽매여있던 것들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경험’이다. 구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이고 몸을 움직여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만지는 행위’를 말한다.
마지막으로는 ‘만남’이다. 타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평소 귀 기울이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 생각과 감정을 내밀하게 바라보고 읽어내고 풀어내는 ‘나와의 상호 교감의 장’이다.
이제는 조금 더 알 것 같다. 여행을 하고 있는데 더 격하게 여행하고 싶은 내 마음의 이유를. ‘단절과 경험 그리고 만남’을 매 순간 더 절절히, 간절히 하고 싶구나 새삼 알아차린다. 한 발 더 나아가, 일상의 삶에서 여행의 기쁨과 효용을 느낄 수 있는 키워드 역시 ‘단절과 경험 그리고 만남’ 임을 발견한다.
결국 ‘단절’의 시간과 공간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오감을 사용해서 능동적으로 매 순간을 ‘경험’하며, 나 자신과의 ‘만남’의 빈도와 질을 높여가면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 있겠구나 싶다. 구체적인 도구로, 글쓰기와 요가, 명상을 활용하면서 말이다.
오늘 이렇게 글로 풀어내다 보니 좀 더 선명해졌다. 이번 여행을 어떻게 더 잘 즐길 수 있을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서도 어떻게 여행하듯이 살 수 있을지 손끝으로 매만지는 느낌이다.
글 | 황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