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한 삶을 사는 사람의 명 줄이 눈에 보인다면 하얗고 단단한 명주실일 테다.
하얗고 붉게 엉긴 실타래는 사람 사이를 끝없이 잇고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인력으로 끊어지지도 함부로 늘려지지도 않는, 딱 그 길이만큼의 삶을 살기도 역행하기도 한다. 하늘은 여러 평온한 실을 자아내다 지루했는지 나를 잉태한 발원지의 실을 꼬다가, 그 실타래만 망쳐놓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아랫물 나의 실까지 드라마틱하게 꼬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도 무탈한 순간이 없었기에 누군가 장난질을 치고 있다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면 아득히 먼 곳에서 실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열이 좋지 않으나 외관이 예쁜 주택은 한겨울에도 실내에서 입김이 난다. 겨울은 추운 게 맞고 여름은 더운 게 맞다며 큰 창 아래 춥거나 더워서 몸을 말고 있으면 정수리로 닿는 볕이 따뜻해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았다. 하얀 노루처럼 흰머리가 빼곡히 올라온 그녀는 새벽마다 법복을 차려입고 차로 20분 거리의 절에 간다. 두 시 반이면 탄내 같은 향냄새와 희미한 로션 냄새, 새벽 공기를 가르는 옷 스치는 소리는 건넛방에서 들렸다.
깜빡깜빡 속눈썹처럼 깨어있던 밤이면 따라나서 추운 법당에 켜진 촛불을 보기도, 진한 향냄새를 맡으며 졸기도 하였다.
“108배를 하자, 흐림. 멍하다고 누워만 있으면 안 돼.”
“하고 싶은 것이 없어요. 먹고 싶지 않고 자고 싶지 않아요. 아니, 다 먹고 싶기도 해요.”
약이 바뀌면 멍하니 평온한 정신에 필수 옵션처럼 식욕 증진과 안절부절못함, 입 마름과 같은 부작용이 딸려와 먹고 있는 것을 뱉어내거나 스팸 덩어리를 숨겨 먹기도 야밤에 맨밥을 퍼먹기도 해 어른들은 자율 배식이 어려운 나에게 건강식을 주려고 노력했다. 살아있음에도 끝없이 건강을 위해 모든 하루를 다 바쳐야 하는, 또래 친구들은 한창 친구를 사귀고 술을 퍼마시고 필름이 끊겨 흑역사를 만들다가 짧은 새내기의 연애를 하는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의 1월 혹은 2월 중순.
해가 반틈 기울어진 낮이면 엄마와 20분 동안 108배를 했다.
비는 기도 없이 쉼 없이 기도하면 땀이 나고 그녀가 기대한 이너피스랄지 절대자를 향한 가녀린 호소는 모르겠으나, 이후에는 그냥 절을 또래보다 월등하게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릎과 발뒤꿈치는 날이 갈수록 재빨라졌지만 기도의 제목은 공란, 이 악물고 아무것도 빌지 않은 건 자비로운 신 따위가 있다면 나에게 이래선 안 되었기 때문에. 사슴처럼 울멍이는 엄마가 옷깃을 붙잡아도 빛없는 눈으로 돌아눕거나 새벽 기도를 올리는 촛불을 불경하게도 입으로 불어 끄기도 했다.
탁탁탁, 줄이 끊어지면 목줄기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입퇴원을 반복하면 계절마다 연락처가 리셋돼 이에 익숙한 친구들은 흐림이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숨었다고 표현했다. 군인이 휴가받아 속세 문화를 탐방하듯 퇴원해 세상에 던져지면 실을 끊지 않은 선량한 친구들을 만났다. 몇 명인가 둥지를 튼 난잡한 자취방 귀퉁이에서 다 식은 맥도날드를 시켜 먹으며 산처럼 쌓인 감자튀김을 집다가 기름진 손가락을 수면 바지에 문질러 닦고 대학교는 고등학교 때와 다를 게 없어 지루하다고, 1학년 새내기는 시커먼 과대와의 추문에 시달리다 휴학했다거나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이런 게 아니었다고 그런 일상적이고 스무 살다운 이야기를 했다.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 감성으로 제멋대로 세상과의 끈을 끊고 명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사이 친구들은 능동적인 스파이더맨처럼 미래의 실을 맺고 있었다. 친구들은 모든 게 멋대로이며 탈옥한 수감자처럼 쥐구멍을 들락날락하는 나를 정체된 시간만큼 기다려 주거나 앞질러 갔다가도, 세상 물정 천치를 클럽에 데려가는 등 향락의 선구자가 돼 많은 것을 가르쳤다.
“선크림이라도 발라, 입술도 혈색이 하나도 없네. 아픈 거 티 내는 거야?”
아픈 사람은 잘 혼나지 않는다. 아프다는 면죄가 있으면 하루 종일 누워있어도 아무것도 생성해 내지 않고 공부하지 않아도 해하지 않고 생존함이 큰 값어치를 해 숨만 쉬는 것에 하루를 통으로 쏟을 뿐이다. 가족들도 혼내지 못하던 나를 친구들은 끝없이 잔소리를, 예를 들면 한파에 스타킹을 신고 나왔다거나 선크림을 안 바르고 연락을 제때 받지 않거나 길을 찾지 못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끝없이 고칠 때까지 혼냈다.
끊어진 실을 다시 묶는 소리가 꺾어진 길에서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