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홍대 근처 이자카야, 유희

by 단소니

유희는 억울했다. 지난밤 고작해야 두 어 잔쯤 마신 것 같은데 이자카야의 노란색 등불 아래 야트막한 사케 잔이 산산이 깨져 발밑으로 뒹구는 것이 마지막 장면,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블랙아웃은 흥겹게 마신 날이면 자주 있는 일이니 대수롭지 않았으나, 눈 뜨고 난 뒤의 광경이 큰 문제였다. 팔 안쪽 오목한 부분부터 손등까지 하얀 거즈가 붙어있었고, 얼굴은 땅이랑 싸웠는지 사람이랑 붙었는지 시퍼런 멍이, 그리고 핸드폰, 핸드폰과 지갑이 없었고.


“아아아...나 좋은 집으로 이사했나 봐 천장이 높아.”

“정신이 드세요? 드레싱 할게요. 얼굴 이쪽으로 돌려주세요, 네.”


숙취로 시야가 안개 같았고 깨지는 머리와 어제 입었던 홀터넥은 온데간데없이 정갈한 병원복에. 내려앉을 듯한 천장이 아닌 드높은 천장과 시야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는 백의의 천사, 카나리아, 나이팅게일. 차가운 알코올 솜도 알코올이라면 알코올인데.


“아오 선생님, 저 또 들어왔어요? 이번엔 누구예요? 외삼촌? 할머니?”

“오른팔 위로 들어주세요, 움직이지 마시고요.”

“자꾸 본인 의사 없이 처넣으면 신고할 거예요, 나 진짜 해버려.”

“곧 교수님 회진오실 거예요. 식사도 나오고요.”


유희는 자주 억울했으나. 유희의 희미하게 연결된 몇 없는 가족들은 주 8일 술독에 빠져있거나 옆 테이블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서 밤을 지새우는, 숙취로 결근해 버리는 회사에 무엇보다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피 말라 했다. 멀쩡한 정신이면 정성스레 고데기를 하고 핫핑크 원피스를 입고 아무 아파트 고층으로 올라가 이렇게 살 바에는 맑은 정신으로 죽겠다고 온 동네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던 유희는. 올해의 설 명절을 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평소엔 하릴없이 농담만 내뱉으나 강경하기 그지없는 교수님도 지난밤 회식한 것 같은 얼굴로 몇 번인지 셀 수 없는 회진을 들어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다. 결론은 정신 차리라, 시골에서 떡 머리에 이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였으나.


“흐림 나는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하려고 했던 거야.”

“네, 언니 거짓말은 안 하죠. 마지막의 개념이 우리랑 달라서 그렇지.”


유희는 병원복을 착착 개키고 캐비닛 안쪽에서 위아래 검은 재킷과 슬랙스를 꺼내는 흐림을 보며 술은 마셨지만 죄는 없다는 일장 연설을 펼친다. 흐림은 새하얗게 일어난 입술을 뜯으며 피를 삼키고 손톱 거스르미도 힘껏 잡아 뜯는다. 보다 못한 유희는 흐림의 손을 잡아 내리고. 유독 건조한 흐림의 병실 침대에 드러누워 숨을 내쉬면 아직도 숙취로운 알코올 향이.


“근데 너 외출 나가? 무슨 검은 옷이야.”

“저 내일 들어올 거 같은데요.”

“고연차는 외박도 되는구나. 그럼 들어올 때 다 소주 한 병만 숨겨와 줘라.”

“미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미친 사람에게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는 건 오유희 한 달 금주와 같은 짓인데, 이게 무슨 훈계람. 검은 재킷과 슬랙스로 갈아입은 흐림은 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턴다. 병실 문을 나서다 본 바닥은 얼룩 하나 없고 하늘은 여전히 겨울. 어쩌면, 정말 겨울이 영원할지도.


“언니, 지흔상 기억해요?”

“지흔상? 빨간 비니 아이돌? 걔 왜?”


내일도 모레도 병동은 지루해. 이번에 퇴원하면 동창을 불러내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며 정신병원 라이프 썰을 털까, 너무 재밌으면 술값을 내려고 할지도 모르지.


“흔상 오빠가 죽었어요. 며칠 전에 스팸 메일을 들어갔다가 긴 유서 같은 걸 봤는데, 나에게 보내기를 저한테 잘못 보냈나 봐요. 오빠랑 막 친하진 않았는데 축구 게임 좀 하고 첫눈 온 날 눈 천사 좀 만들고. 아 저 새우깡 엄청 좋아하는데 오빠가 그냥 탈출하고 싶어서 밖에서 사 오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그래서...”


어쩌면 시간이 간다는 착각이 계절을 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겨울은 영원한데 봄이 속아 흰 눈을 덮고 바보같이 날이 따뜻해진다는, 장례식장에 간다는 사유로 외박 승인이 어떻게 났는지 캐묻는 유희에게 사흘 동안 밥을 먹지 않았고 교수님 면담 때 한 마디도 하지 않거나 승인해 주면 약을 먹겠다며 바닥에 누웠다고 하자 독한 년이라 혀를 차는 유희, 유희, 유희.



**번외 검은 봉지의 새우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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