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정각 오방색 방울 소리

by 단소니

말간 조약돌을 쌓으며 소원을 빈다고. 겉면이 차고 둥근 돌이 켜켜이 쌓인 돌탑이 수두룩한 중턱쯤에는 까실한 소나무가 무성하다 별안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터가 나온다. 초입부터 산세가 험해 오르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하고. 소원의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조약돌을 집어 멀리 던지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누군가의 염원이 달음박질쳐 사라진다. 흐림은 머리 밀린 중 같은 터의 한가운데 누워 소망이 탈락되는 소리를 듣다 까무룩 잠들 뻔하다가.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소원에 헛짓거리야.”

“나 소금 뿌려야 하는데. 장례식장에서 이틀이나 있었어.”

“그거 다 미신이야.”

담배에 쩐 탁한 목소리가 앙상한 나무 사이로, 을씨년스러운 겨울비가 나리고 움푹 젖은 낙엽 냄새, 성마른 이파리가 눅눅히 젖는 풍경에 정갈히 쪽 진 머리의 노인이 그림자처럼 스친다. 오방색의 현란한 패턴의 저고리와 짙은 네이비의 치마에 앞코가 뾰족한 핑크색 버선을 신은 그녀에게서는 움직일 때마다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처럼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무당한테도 미신이 있어? 그거 팔아서 장사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또 심기가 불편할까. 병원에 전화해?”


돌무더기는 성의 없는 발짓 몇 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잡초는 쉬이 뜯기지 않았지만 잇새로 질겅이며 어금니를 앙다물면 목 끝으로 쓴 물이 올라왔다. 노인은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흐림을 가만히. 그저 가만히 보기만.


“지흔상이 죽었어. 그냥 죽어버렸어. 이유는 모르겠어, 할머니.”

“갈 사람은 가는 거지, 목숨줄은 살아있는 사람 몫이 아니야.”

“안 죽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살아있는 사람은 왜 맨날 아무것도 못 하는데.”


살아생전 어떻게 산 건지 사람이 참 없다. 눅눅하고 오래된 향냄새에 고사리 몇 줄과 고기가 둥둥 뜬 육개장 냄새가 섞여 밀려오고 오늘내일하는 촛불이 곧 꺼질 듯 타오른다. 하객이 없는 결혼식장은 빈집이 될까 알바생이라도 모집한다는데 장례식장도 조문객을 섭외해 가는 길 잔치처럼 배불리 먹여 보낼 순 없을까, 마지막으로 본 흔상의 깡마른 목덜미가 생각나, 흐림은 수육 한 점 먹을 수 없었다.


“흔상이가 신세 많이 졌습니다, 흐림 씨.”

“저를 기억하시네요. 아녜요.”

“그냥 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달리 할 말이... 요새는 좀 어떠신가요.”
“똑같아요. 오늘을 기점으로 나빠지겠죠.”


눈썹이 짙고 눈매가 강한 건 동생과 똑같은, 이 집도 내려온 유전이 참 강하기도 하지.

뭘 하자고 별 연고 없는 남의 장례식장 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발인까지 자리를 지켰는지, 한 줌 재가 되어 멀리 사라진, 정말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은 흔상은 염원하던 유럽 어느 구석 바에서 초록빛 압생트를 시켜 예술가 놀이를 하고 있을지, 너는 그렇게도 모질게 나에게 몇 자를 남기고 없어지고 싶었는지. 흐림은 이틀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몸을 뒤집어 다 젖은 낙엽에 고개를 묻는다. 새푸른 봄은 땅 밑에 처박혀 올라올 틈 없이 눈 나리고 비 내려 엉망으로 몸을 뒤틀어 풀숲에 간신히 숨 쉰다. 무성한 풀을 해치고 다가온 코가 뾰족한 버선이 보인다. 틀어쥔 주먹을 하나하나 펴주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등, 향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있는 까칠하고 낡은.

흐림의 울음소리가 겨울 땅을 잔잔히 울려 커지면 어디선가 먼 과거에서 들리는 듯한 휘파람 소리와. 노인은 들썩이는 흐림의 등에 손을 대고 하염없이 쓰다듬는다. 짤랑이는 방울 소리와 멈추지 않는 훌쩍임에 이름 모를 잎새는 푹 젖어 무게를 불려 가고.

길고 긴 새빨간 이명 끝에는.


“나 들려, 할머니. 그게 들려.”

짤랑이는 방울 소리가 뚝. 오방색 저고리 안쪽에서 구식 핸드폰을 꺼내 든 노인은 목을 가다듬는다. 네, 고생이 많으십니다. 유흐림 환자 보호자 비슷한 사람입니다. 네네, 전에 전화 한번 드렸었죠. 지금 여기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안정제랑 네, 아니 공격적이진 않는데, 환청이랑 에피소드. 아, 산 밑까지 엠블런스 대기 가능해요. 네, 오시면 전화주세요. 주소 문자로 보내놓을게요.

“겨울이 참 길다, 아가.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렴.”

잔잔한 겨울 자장가처럼, 노인의 품은 씁쓸한 나무 냄새와 덤불 향, 그리고 구슬픈 새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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