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여덟 시 반 A동 편의점

by 단소니

별거 아님에도 굳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수능이 끝나면 달달 떨며 운전면허 실기 시험을 치르고 보험도 없는 친구들을 뒷좌석에 태워 야밤의 선유도 공원에 가고 싶었고 어쭙잖은 동네 대학이라도 머리끝까지 술 마시고 지울 수 없는 흑역사의 밤을 보내거나 어설픈 화장을 하고 나이트와 클럽을 구분 못 해 요상한 조명 아래 공짜 술을 마시고 19에서 20으로 바뀐 숫자에 생경해하는. 학생 꼬리표를 떼어내고 세상으로 뱉어진 그런 일상적인 순간을, 제때 치르지 못한 통과의례는 오랜 시간 신기루처럼 남는다.


“술 많이 마신 다음 날은 헌혈 안되는 줄 몰랐어.”

“그럼 넌 언제나 헌혈이 안 되겠네.”


긴 밤 지새우고 종래에는 기운차게 술상을 엎는 엔딩까지 보고 기절했다는 지견은 여상하게 컵라면을 뜯으며 혀를 찬다. 허삼관매혈기마냥 틈만 나면 건강하다 못해 솟구치는 피를 좋은 일에 쓰던 그녀는 세상만사 고민이랄 것이 별로 없었다. 연애와 꼰대와 학비와는 무관한 제 3의 삶을 살거나, 그리고 헌혈을 언제나 할 수 있는 것. 아니, 술 많이 마신 다음 날 빼고.


“나는 헌혈 못 하는데. 약 많이 먹어서.”

“너 전에는 저체중이어서 못했다며. 그냥 네 피는 운명적으로 세이브된 거 아닐까.”

“그래도 못한다니까 하고 싶어. 내 피는 더럽지 않아.”


헛소리 작작 하고 남은 만두나 먹으라는 타박을 들으며. 그러니 사실 헌혈은 아주 상징적인 장치일 뿐이다. 오랜 투약이 마침내 언젠가 끝나면 드넓은 광장으로 뛰어나와 자유를 외치며 베드에 누워 피를 뽑아 완치를 증명하는 것. 허나 이렇게 투병이 길어질 줄은 18살 그 밤 어느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또래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게나 소소하고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이불 귀퉁이를 끌어안고, 나의 죄는 무엇일지, 2년간 군대에 동결된 듯한 내 삶은 모두에게서 얼마나 뒤떨어져 있을까 떠올리며. 건넌방 엄마가 들으면 먼 곳에서 대못을 박는 소리가 땅땅 울릴 그런 까슬까슬 사포 같은 밤을 보내곤 한다.


흔상을 보내고 울컥이며 넘어온 시간은 겨울이었다가 봄이었다가 또 여름이 온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폐쇄병동에서의 시간은 독한 약물과 혼곤한 정신이 빚어낸 콜라보에 자체 삭제되어 힘들었을지, 슬펐을지 기억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면회할 수 없는 병동에 있음에도 어떤 어깃장을 부렸는지 하나와 나안은 통제구역 유리문에 들러붙어 입 모양만 뻐금거리며 안부를 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환상일지 실제 하나와 나안일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린아이가 재잘대는 소음이랄지 노이즈랄지, 환청은 단숨에 잠잠해졌다. 약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지. 흔상이 있는 곳, 이곳은 한동안 여름인데 너는 여전히 눈 쌓인 병동 뒤편 정원일지. 뜨거운 열기에 땀을 팥죽처럼 흘리며 간간이 빨간 비니가 떠오르면 난 슬퍼해야 하는지, 몽땅 잃어버린 시간을 무시하고 웃어도 될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 말고 헛소리나 하던 흔상은 없고. 세상은 쳇바퀴를 타듯 굴러감에.

헌혈 규정은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신체 건장한 청년도 몇몇 제약이 있었다. 환상처럼 피를 뽑아 건강을 증명하는 건 그냥 20대의 허세 그 정도일지도.


“지견, 너는 고민이 뭐야?”

“니가 이런 거 물어보면 대답해야 하는 거.”


전공 수업에 자꾸 잠들어서 낮잠 자다 꾼 개꿈 같은 학점이 나온다고, 학교 앞에서 자취하고 싶은데 집에서 신뢰 등급이 9등급쯤 돼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는. 염색과 탈색 펌을 반복한 지견의 긴 머리칼 끝을 만지고 있으면 낭창한 개털 같아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흐림, 그럼 그냥 장기기증을 해. 기증하면 조조 영화 4,000원에 볼 수 있대.”

“살면서 조조 영화를 보러 갈 일이 많을까.”

“두 번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길 수도 있지.”


엄마의 바람대로 살아있을 때 장기를 기증하거나 안구를 적출하는 일이 없도록 몇 가지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신청서를 송부한다. 핑크색 장기기증 스티커를 주민등록증에 붙이며 흙으로 돌아가도 내 한 몸 요긴하게 쓸 수 있겠구나, 담배를 덜 피고 운동을 더 해야겠다고, 그럼에도 그럼에도 살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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