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여섯 시 십이 분, 일출

by 단소니

간절히 바란 미래는 도래하지 않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려 눈 감았다기 뜨면 10년이 흘러있다든가 오늘을 건너뛰어 말끔한 내일로 펼쳐진다고 하는 기적은 일어날 턱이 없다. 모든 순간을 꼭꼭 씹어 삼켜내야, 칠흑 같은 고통과 이따금 씹히는 별사탕처럼 달콤한 열락을 속수무책으로 맞이해야 시간은 겨우, 겨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군요. 석 달 뒤에 보기로 하고. 약은 전이랑 똑같이 최소 용량.”


백발이 성성한 그는 시대에 한참 뒤처진 종이 차트에 빼곡히 무어라 적으며 희부연 미소를 보인다. 느리고 낮은 음성에 다갈색 눈동자. 사람 많은 대학병원이 부담스러웠던 흐림은 불현듯 어느 날 혜화역 3번 출구를 끊고 동네 작은 병원으로 적을 옮긴다. 병원은 예약 하나 받지 않은 작고 낡은 곳이었으나 상담에 불필요한 보탬이 없었고.


“누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거절하지 말고, 마음을 이렇게 좀 열고.”

“네, 알았다니까요. 그렇게 할게요. 근데 아무도 없어요.”


증상 외에 일상적인 잔소리를 잊지 않고 붙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상담은 3분을 넘지 않고 끝났다. 정체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료실 바깥에는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찾아온 늙은 할머니가 딸과 꼭 붙이고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다. 무뚝뚝한 간호사가 내민 약을 가방 앞주머니에 꼼꼼히 챙겨 넣는다.

파도가 밀려오는 검은 해변의 유리병이다. 미명 하나 깃들지 않는 검은 밤이고 들어주는 이 없는 철썩이는 소리는 쉼 없이 유리병을 뒤흔든다. 밟히는 모래알은 유리병이 깨져 사금파리가 돼 한낮에는 빛을 받아 무척 예쁘지만, 빛없는 밤이면 보이지 않는 가시가 되어 날카롭게 찌른다. 발바닥에 검푸른 피가 맺혀 소금기 어린 물에 휩쓸려 아렸다가 낫기를 반복한다.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여긴 영원한 밤이야. 하늘도 땅도 구분 없이 하나로 이어진 우주이고, 이 파도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아, 왜냐하면 이 바다에는 나밖에 없거든.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집채만 한 파도에도 용케 깨지지 않은 유리병은 두 눈을 꼭 감고 짠물을 들이켰다가 내뱉는다. 발이 닿지 않고, 수영을 배운 적 없어 끝없이 가라앉을 듯 말 듯 휩쓸리면 가물한 정신 너머로 건넌방 엄마가 스쳤다가, 유리 벽에 매달린 친구들의 얼굴과, 성마른 흔상의 얼굴과.

아침이 오기 전 하늘이 가장 어둡다. 예기치 못한 순간 바다는 붉은 태양을 뱉어내 짙은 주황빛이 파도를 찢고 올라온다. 긴 숨을 뱉으며 수면 위로 튀어 올라오는 유리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매일 뜨는 해가 뜨고 새 아침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해수면이 잠잠히 잦아든다.


“흐림! 너무 오랜만이야. 건강히 잘 지냈어?”

“바쁘지, 뭐. 일하다 정신 들면 주말이야. 너도 좋아 보인다.”

“너는 예전이랑 똑같다. 일단 뭐 마시고 시작하자. 커피 괜찮아?”

끈끈한 상처 위로 활강하는 물고기 두 마리가 새겨진다. 타투를 새기면 호적도 파버리겠다는 엄마의 엄포는 20대 한정이었는지 3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오늘 호적은 안전하고.

고개 숙여 집중한 욘시의 동그란 정수리가 귀엽고. 아프지 않겠냐고 호들갑 떨던 이들의 말은

엄살이었는지 참을 만했다. 변함없이 요정 같은 욘시의 재잘거림에 저녁 빛이 반짝인다.

아직도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고요한 일상을 뒤흔드는 조울을 차치하고도 남들처럼 보통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하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흐림은 살아갈수록 물음표가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파도가 잠잠한 날이 지속되면 행복하다가도 불안했다. 너울지는 파도는 예기치 않게 유리병을 삼키기에.

“순심이가 언니 얼굴 까먹겠대. 집 나가니 우리 순심이도 잊은 거야?”

“아니, 엄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내가 너무 자주 가도 귀찮지 않을까?”

“보고 싶어서 그러지. 밥은 잘 챙겨 먹어?”

“걱정을 하지마. 엄마 딸 생각보다 야무지게 살고 있어. 못 믿겠지. 그냥 믿어.”


도래하지 않은 내일은 알 수 없으니, 그러니 오늘을 살아내기로 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니 두려울지언정 삼켜내기로, 그렇게 미덥지 않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채찍질하며 내일로 걸어가 보기로. 그렇게 하기로 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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