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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08. 2022

빗 속의 낭만 in New York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비가 아닌, 비가 오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비가 오는 날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가 싫다. 발이 젖는 것도, 우산을 챙기느냐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것도, 모든 활동에 번잡함이 추가되는 것도 싫은데 비가 오길 바라는 건 온전히 그 소리를 듣기 위함인 듯하다.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그런 점에서 매력 있는 작품이었다.


개츠비(티모시 샬라메 분)는 학교 신문 기자인 여자 친구 애슐리(엘르 패닝 분)의 취재를 돕기 위해 오랜만에 뉴욕으로 온다. 자유와 낭만을 사랑하는 그는 엄마의 고급스러운 취향만 아니었어도 뉴욕주 북부에 있는 고리타분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츠비는 애슐리의 인터뷰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뉴욕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좋은 것들, 현대미술관 전시나 '대니얼'에서의 저녁식사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카라일 호텔 바에서의 시간과 멋진 호텔 스위트룸까지 준비한다. 하지만 애슐리의 인터뷰 일정이 꼬이고, 꼬이고, 꼬이면서 개츠비는 혼자서 때로는 챈(셀레나 고메즈 분)과 때로는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가기 싫었던 가족 행사까지 참석하는 등 예정과 다른 일정들로 시간을 보낸다. 비 내리는 뉴욕에서.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어떤 장면은 유치하기 했지만 의미 있는 대사도 있었다. 가령 미술관에서 챈이 개츠비에게 꿈을 물었을 때 "모르겠어 허우적대는 중이야"라고 말하던 그 표현이 좋았다. 엎치락, 뒤치락. 꿈에 대한 생각은 변화가 잦고, 많고, 누군가(아마 나 같은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찾아 헤맬 테니까. 꿈속을 허우적거린다니, 헤매고만 있는 것 같아 불안했던 시간들이 낭만적인 여정처럼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개츠비가 그런 사람이었다. 미술관을 거닐고, 피아노 연주를 듣기 위해 카라일 호텔 바를 찾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낭만을 아는 사람. 그런 개츠비를 여자 친구 애슐리는 '사라진 시대의 로맨틱한 꿈'을 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의 말에 이리, 저리 휘둘리며 이곳, 저곳 따라다니는 애슐리야 말로 허망한 것을 쫓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애슐리는 개츠비와 대화를 나누었다기보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유명 감독을 인터뷰할 기회를 얻은 황홀함, 떨리는, 흥분된-을 말하기에만 바빴다.




반면 개츠비의 꿈을 묻고, 들은 챈은 "틀에 박힌 건 싫은 거네" 그를 이해한다. 이제까지 꿈이란 되고 싶은, 소망의 것을 말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음을 통해 자신을 말하다니, 틀에 박힌 건 싫은 게 맞는 듯하다. 이해는 앎에서 시작되니 챈은 그를 아는 사람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이해가 담긴 대화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거기다 빗소리가 겹쳐지니 미술관에 있는 두 사람이 꽤나 다정해 보였다.


결국 개츠비는 애슐리를 보내고 뉴욕에 남는다.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다. 무언가 찾은 건지도. 그리고 또다시 비가 내리는 뉴욕 거리를 걸어 6시를 알리는 시계탑 아래를 서성인다. "바깥은 우중충 비가 보슬보슬 옅은 안개에 싸인 뉴욕 시내. 여섯 시에 만나기로 한 연인"에 화답하며 챈이 말했던 "그랜드 센트럴 역 시계 아래에서, 영화처럼" 두 사람은 "델라코트 시계, 센트럴 파크의 동물상 돌아가는..." 그 아래서 우연히 만나, 옛날 영화처럼 비를 흠뻑 맞으며 키스를 나눈다.





한 시간 반 러닝 타임 내내 거의 비가 온다. 어떤 장면에서는 빗소리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인물 간의 대화를 덮을 정도로 빗소리가 컸고, 실내 장면에서는 비가 오는 바깥 풍경을 느낄 수 있게 화면을 이동하는 등 영화는 비를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활용하는 듯 보였다. 특히 흠뻑 비를 맞고 들린 챈의 집에서 개츠비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과 이어지는 대사는 비 오는 밖을 떠올리게 하면서 바깥의 찬 공기와 대조되는 포근함으로 영화 속 명장면이 되었다.


그렇지만 러닝 타임 동안 내내 집중해서 본 건 아니다. 빗소리에 따라 흘러가듯 본 것 같다. 손글씨 작업을 할 때 백색소음으로 '효리네 민박'을 자주 틀어놓는데, 그런 것처럼 빗소리와 (알아듣지 못해서 딱 좋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 거기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 형태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사실 티모시 살라메인 줄도, 셀라나 고메즈인 줄도 모르고 개츠비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 때문에 보게 된지라 비보다 눈을 기다리게 되는 계절에 영화 내내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영화를 다 보고 나서 OST를 검색하다 감독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걸 알았는데, 그 점이 꽤나 아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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