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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an 14. 2023

올 해는 일기를 써볼까요?

예능 <알쓸인잡(tvn,2023)>

새 해를 앞두고 매해 스타벅스에서 다이어리를 받을 수 있는 프리퀀시 이벤트가 진행된다. 나는 일찌감치 2023년 다이어리로 찜해 놓은 상품이 있어서 올 해는 프리퀀시를 모으지 않았지만 회사 과장님이 모으고 있다고 해서 받은 프리퀀시를 전송해 드렸다. 20개의 프리퀀시가 한 권의 다이어리로 바뀐 날 과장님은 내년에는 감사 일기를 쓸 거라고 하셨다.


새 해가 돼서 과장님께 감사 일기는 잘 쓰고 계신지 물었는데 감사 일기를 쓰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 그냥 일기 쓰기로 계획을 바꿨다고 했다. 그리고 한 주가 흘러 다시 물었다. 일기는 잘 쓰고 있으신지. “일기 쓸 때 쓰면 안 되는 거 있잖아. ”나는 “, ”오늘 “로 시작하면 안 되는 거. 그래서 못 쓰겠어. 너무 어려워.” 일기 쓰는데 그런 규칙이 있는지 몰랐다! 놀라운 사실에 언니한테 일기 쓸 때 쓰면 안 되는 표현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었는데, 언니의 대답이 또 나를 놀라게 했다. ”그건 모르겠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에 따라 써야 한다고 배웠어. “ … 난 왜 그런 기억이 없지…. 그래서 지금까지 일기를 쓸 수 있던 걸까.


드라마 <런 온>에는 일기를 쓰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육상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어쩌다 보니 미주가 일하는 영화 촬영장에서 드라이버로 알바를 하게 된 선겸은 긴 대기 시간동안 할 일이 없었다. 미주는 선겸에게 영화라도 보라며 자신이 이용하는 사이트 아이디랑 비밀번호까지 알려주지만, 정작 선겸은 검정 펜을 들고 흰 노트와 싸우고 있었다.


“기선겸 씨 뭐해요?”

“일기 너무 어려워요. 제가 글을 너무 못 쓰는 것 같아요.”

그러자 미주가 아주 심플하게 말한다.

“원래 일기라는 게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 혼자 쓰는 건데 누구 눈치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장력이니 글빨이니 다 제쳐 놓고 솔직하게만 쓰면 돼요. 알겠죠.”

그 말에 선겸은 아침에 써 놓았던 어제 일기 “낯선 곳에 왔다. 오미주 씨가 아팠다” 마지막에 문장 하나를 추가한다. “무서웠다.”


드라마 <런 온>의 스토리를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유명한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매사 행동을 조심해야 했던 선겸은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자 선겸이 조심스럽게 꺼내 놓은 솔직함은 어떠한 사건이나 일이 아닌 ‘감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겸은 미주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그녀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기회가 주어지자 무엇도 묻지 않고 그녀가 일 하는 현장까지 달려와 무한대기까지 타는 알바를 하고 있다. 부자였지만 한 번도 돈 자랑한 적 없던 그가 아픈 그녀를 위해 스텝들 숙소를 전부 인근 호텔로 옮겨주기까지 한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때까지도 형태를 갖지 못하고 떠다니던 감정이 “무서웠다” 그 말을 적는 순간 확실한 모양으로 선겸에게 사랑으로 남았다.



“아무리 격렬한 감정도 문법을 지켜 쓰다 보면 다듬어지죠.”


그래서 나는 일기를 쓴다. 선겸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건 아닌데 나 역시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다. 특히 두려운 마음, 슬픈 심정은 가급적 혼자 정리하려 한다. 하지만 정리하는 법을 모르니 그저 참고 참으며 넘겼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가슴에 무언가 얹힌 기분이 든다. 흘러 보내지 않은 감정이 몸을 돌 다 어디선가 터져버리면 그게 병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감정도 잘 소화시키지 않으면 체한다. 그래서 스물 중후반 나의 일기는 주로 기도문으로 쓰였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은 예배 시간이었다. 하나님께 아뢰며 솔직한 심정을 토해 낸 기도일기는 여러 종류의 노트에 아무렇게나 써 내려가 있다. 단정하지 못 한 글씨체, 어느 페이지에는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억누르듯 힘주어 깊게 눌린 불펜 자국이 남겨져 있기도 하다.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그 또한 나임을. 그렇게 써내려 가다 보면 가슴 아픈 상황도, 겁을 먹게 한 일도 그렇게까지 느낄 필요 없는 일이었음이 보인다. 눈앞을 가리던 근심이 벗겨지게 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확실한 모양으로 다듬어주는 게 일기의 힘인 듯하다.


분명 힘들다고 토하듯 시작한 일기였는데 그 끝엔 바람이 담긴다. 그러니 내일은 달라져있게 해달라고. 감당할 수 있는 내가 되게 해달라고. 절망 대신 희망으로 끝을 낸다. 엔딩요정을 만들려는 강박은 아닌지, 글을 마무리할 때마다 희망적이고자 하는 나에 대해 고민한  적도 있다(참 어렵게 삽니다). 하지만 <알쓸인잡> 4화에서 희망 없이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는 이호 법의학 교수님의 말에 우린 이처럼 희망을 찾고 소망을 품을 존재로 지어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기가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심채경 천문학자의 말에도 깊이 동감했다. 선겸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무렵은 인생을 전부 걸었던 육상 선수 생활을 그만둔, 혼란한 시기였다는 점이 그렇다.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지만, 살아있는 우린 본능적으로 이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묻게 되는 어느 때가 온다. 지금 와서 보니 선겸이 일기를 쓰고자 했던 건 ‘방향을 못 잡아서 ‘, 어디를 뛰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올 해는 조금 더 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지금까지도 쓰고 있었지만 조금은 다른 형태로. 우선 매일 성경을 한 장씩 필사하고, 드라마 대본도 전체 필사를 해볼 생각이다.. 사실 2년 가까이 이어져온 웨이브 리뷰 활동이 작년으로 종료됐다. 언젠가 그만두게 되는 날이 올 거란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매 달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진심을 담기 위해 애써왔다. 리뷰단을 하며 가장 좋았던 건 한 달에 최소 2편 이상의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활동이 종료되지 않았으면 이 글에 앞서 리뷰 글이 먼저 올라왔을 것이다. 2주간 새벽예배를 드리느냐 다른 걸 할 수 없던 것도 사실이지만, 써야 하는 약속이 사라지자 게을러진 것도 맞다. 그래서 올 해는 나와 약속을 하려 한다. 일기를 쓰자고.


성경이나 대본을 옮겨 적는 그 자체를 일기라고 볼 수 없지만 글을 옮겨 적으면 다양한 생각이 떠올려진다는 건 드라마 대사를 옮겨 적으며 많이 경험했다. 여러 글에 빗대어 오늘 하루 나를 되돌아보는 것도 일기를 쓰는데 도움일 될 것 같다. 일기를 쓰는데 어떠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면 미주의 말처럼 ‘솔직함‘일 테니까.  옮겨 적으며 느끼는 생각을 소스 삼아 무채색에 가까운 일상을 다채롭게 담아보고 싶다. 그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남기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렇게 내 안에 여러 모습의 나를 기록해 두고 오래 사랑해주고 싶다.


또 글이 희망적이게 끝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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