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데미안(헤르만헤세 지음, 서유리 옮김, 위즈덤하우스(2018)]
“새는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너무도 유명해서,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듯 글을 쓸 때 자주 인용해 왔다. 그럴 때마다 가능하면 빨리 데미안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일렀다. 나는 주로 이런 부담감들로 여러 일을 해내는 편이고, 그렇게 갑자기 데미안을 읽었다.
책 <데미안> 에는 성경 속 인물과 사건을 인용한 대화가 주를 이룬다. 내게 있는 성격적 지식과 신앙의 고백은 싱클레어와 데미안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았기에 두 사람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책이 신앙적 논쟁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었기에 책 속 두 사람과 괜한 씨름을 하진 않았다.. 사실 그런 걸 떠나서도… 이들의 대화는 난해하고 추상적인 주제이긴 했다. 그래서 끝까지 읽기는 했다만,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를 전부 이해하긴 어려웠고, 두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힘들 듯하다.
다만 이들의 대화가 무엇을 향해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부분이 책 <데미안>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였다는 생각이 든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기 전 이미, 그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 싱클레어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프린츠 크로머와 악연이 시작된 것도 어떻게 본다면 싱클레어의 자아에 생긴 균열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평온하고 안락한 집, 아버지의 세계가 점점 옥조여 왔다. 천국 같은 집이 좋으면서도 벗어나고 싶었고, 다정한 어머니의 품에서 모든 걸 다 고백하고 싶다가도,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안전이 더 이상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이러한 부대낌은 청소년기를 거치며 나만의 세계가 형성되어 갈 때 경험해 본 적 있다. 그렇게 ‘싱클레어’라는 작은 세계, 곧 ‘알’이 흔들리며 균열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무렵 만난 데미안과의 대화를 통해 싱클레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 한 방식으로 성경 속 인물과 사건을 해석하게 된다. 부모님을 통해 배우고, 학교와 교회에서 일러주던 개념들을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면서 싱클레어의 고뇌가 시작된다. 데미안과 성경 속 인물인 ’카인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이야기한 그날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싱클레어의 삶에서 어떤 것을 인식하여 받아들일 때 의심하거나 비판하게 되는 시선을 갖게 되는 사건으로서 크게 자리한다.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되는 일. 어쩌면 이것이 알이 깨지는, 하나의 세계가 파괴되면서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모습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는 어른들이 보기에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거나 신성 모독 같아 보일지라도, 자신만의 시선으로 기존의 이론을 재해석해보는 시도였다. 데미안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 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느끼는 좌절, 또 한 번의 타락, 다시 숭고해지는 여러 과정 속에서 싱클레어는 몇몇 사람을 더 만나고,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내면을 살피며 독립된 ‘싱클레어’를 만들어간다.
도입부의 적은 유명한 문장 뒤엔 두 문장이 연이어진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이면서 악마이고,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계속해서 싸워나간다. 그리고 이 책에선 그 싸움을 난해하고 철학적인 싱클레어와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의 대화에 담아낸 듯하다.
앞서 말했듯 책 <데미안>에 나오는 모든 대화를 이해했고, 전부 동의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데미안>을 읽은 뒤 접하게 된 그림책이나 로맨스 드라마, 영화 등 장르를 불문하고 등장하는 인물에게서 ‘알을 깨는’ 행동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거의 (사실 ‘거의’라는 단어는 빼고 싶을 정도로) 모든 이야기가 ‘자신에 이르는 길‘을 담고 있었다. 내가 여러 글에 <데미안>의 문장을 자주 인용했던 건, 이러한 이유였음을 좀 더 확실히 알게 된 기분이다.
싱클레어와 비슷한 시기 때 이 책을 읽었으면 어땠을까? 아마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 읽다 말았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은 좋은 대화자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익숙한 삶에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내면이지만, 문득 어느 순간에 싱클레어처럼 내 안의 우물에 돌이 하나 떨어진 것 같은 파장이 일어날 때가 있다. 내면을 향한 고뇌는 특정 시기를 지나며 끝나는 게 아니다. 시기마다 더 여물어지거나, 또 한 번 세계의 파괴가 일어날 수도 있겠다. “해석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기에” 그렇기에 이 책이 여러 세대를 아울러 권해지는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