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오리지널 <박하경 여행기(2023)>
하경(이나영 분)의 귀에 속삭이듯 말하는 루나가 이브를 유혹하던 사탄처럼 보였다. 붉은빛으로 가득했던 공간의 분위기가 이런 상상을 거든 것도 있다. 하경이 있는 이곳은 군산. 제자 연주(한예리 분)의 전시를 보기 위해 처음 군산을 찾았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연주의 공연이 시작됐다. 흔들리는 빛을 내는 초를 들고 들어오는던 연주의 비장한 걸음은 초를 내려놓자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는 발모양으로 바뀌었다. 낯선 장소에 낯선 분위기. 예술은 이런 건가, 난해하단 생각이 들던 차에 루나가 하경에게 속사였다.
“뭐 하는 건가 싶죠? 심오한 게 아니라 그냥 다 설정이에요. 예술가병 아시죠? 맨날 자기 정체성이나 우울증 가지고 작업하고. 애매한 재능이 진짜 사람 미치게 하거든요. “
국어 교사인 하경은 군산으로 내려오기 전 진로상담을 위해 교무실을 찾은 학생에게 ‘나쁜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었다. 작곡가가 되기 위해 대학을 포기하겠다던 학생에게 음악은 대학 가서 해도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응원해주지 않았다. 꿈을 먹고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하경은 알고 있다. 경험상 대학 가서 해도 늦지 않고, 대학에서 배움을 통해 더 많은 걸 해볼 수 있으며, 다른 꿈이 생겼을 때 덜 불안할 수 있기에 대학이란 선택지를 권했을 테다. 어찌 보면 루나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심오한 예술은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꿈이니까.
실제로 연주는 불안정해 보였다. 과하게 밝다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씩씩하게 말하고 뒤 돌아 울었다. 반나절 사이에만 연주의 여러 감정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연주와 연주의 그림 그리고 공연에서 느껴지던 불안한 느낌은 예술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단어만으로는 이해받기 힘들다. 연주가 진로 고민을 해올 때 응원이 아닌 만류를 했더라면 연주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까. 지금이라도 루나 말처럼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포기하라고 말해줘야 하는 것일까. 하경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내 얼굴에도 고민의 주름이 생겼다.
평일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주말이면 카페에 나와 글을 쓴다. 브런치 초반에는 회사 생활에 대한 글을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를 보며 리뷰성 글을 쓰거나 대사에서 받은 감상을 개인적인 이야기에 담아 풀어내고 있다. 이런 나를 작가라고도 불러주는 분들이 계시다. 그럴 때마다 낯간지럽다. 익숙하지 않으며, 과분한 호칭이라 생각한다. 글로 밥을 벌어먹을 만큼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걸 알기에 직장인이라는 본캐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비겁한 것 같다. 올해 초에는 그렇지 않아도 바쁜 본캐의 삶에 글 쓰는 삶까지 분주해지면서 양쪽 다 휘청이다 둘 다 망할 뻔했다. 정신없이 본캐의 삶을 살면서 종종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잊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써야 한다는 이상한 압박을 느낄 때도 있다. 왜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일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 이미 세상엔 좋은 글이, 시선이 가득한데. 결이 다르다 할지 몰라도 연주를 보며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나는 내게 갖고 있다. 어디까지 응원해주어야 하는 걸까 하는 고민말이다.
연주에게 하경은 자신을 처음으로 응원해 준 사람이었다.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가려하는 게 불나방 같다던, 칭찬이라 했던 하경의 모든 말을 연주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응원이 ‘불나방’으로 그가 추구하는 작품의 세계관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붉은빛으로 가득했던 방의 분위기도, 바닥에 누워 발버둥 치던 모습도 모두 ‘불나방’을 연상시킨다(심지어 축하 떡에도 불나방 모양이 찍혀있었다). 그럼에도 골목에서 하경에게 말하는 연주를 보는데 ‘그때 왜 날 말리지 않았어요?’라는 추궁과 ‘덕분에 예술을 하고 있어요’라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웨이브오리지널 [박하경 여행기(2023)]에선 이런 양가적 감정을 자주 느낄 수 있다. 아직 4화까지 봤지만, 시청한 모든 회차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양쪽 다 우리가 잘 아는 감정이다.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감사하는 마음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무서워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마음까지도. 20분 남짓의 짧은 시간 속에 많지 않은 대사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알고,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만든다. 모든 감정이 공감에서 비롯된, 알 것 같은 마음이라는 게 드라마에선 마주하기 힘든 신기한 경험이었다. 응원받고 싶지만 그만두고도 싶은 두 가지 마음이 내게도 있기에, 하경의 입장에 자연스럽게 내 삶이 투영되면서 연주를 응원해줘야 하는지 고민했던 것 같다.
하경은 또 한 번 연주를 응원한다. 연주의 작품 세계를 전부 이해해서가 아닌, 연주를 알기에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하경은 과거 연주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술이 하고 싶은 거잖아. 해봐, 계속해봐.” 오랜만에 만난 제자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닌 예술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곡을 하고 싶다던 학생도 음악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 소수에 불가하다는 하경의 말에 성공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했다. 꿈의 종착지를 성공이나 명예 같은 곳으로 설정해 놓고 포기를 먼저 권하는 세상 속에 한 사람만은 그저 그 길을 걸어가 보려 하는 시도를 응원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성공하면 좋겠지만, 성공을 목적으로 둔다면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야말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가하니까. 하경이 연주를 응원하는 마음은 아마 이런 생각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훗날 연주는 하경에게 그때 왜 자신을 말리지 않았냐는 원망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적인 N을 품고 있는 나는 자주 현실에 발이 묶여 뜨거운 불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이 삶도 내가 선택한 가치를 담고 있기에 가끔 괴롭지만 불행하지 않다. 만족도 있고. 그렇기에 나는 연주와 하경의 반 학생이 갖고 있는 말려주기 바라는 마음과 응원받기 바라는 양가적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설사 과거에 하경이 연주를 말렸다 해도 불나방처럼 날아갔을지도. 더욱이 이들의 목표가 성공도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 불행하지도 않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도 응원뿐이다. 어색함에 경계심 가득했던 연주의 공연은 하경이 반응함으로 분위기가 전환된다. 모두 랄라라, 연주를 따라 노래를 부르고 살랑살랑 춤도 추며 돌아가며 한 곡씩 노래하는 축제의 장이 된다. 응원을 힘입은 연주의 날갯짓이 어디까지 날아가게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경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힘든 인생을 사는 건 하경이 아닌 연주일 테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경이 연주에게 보낸 응원은 뒤에서 다른 말을 한다거나,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그 사람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가벼운 응원과 다르다. 연주의 초대장을 받고 그를 보기 위해 군산까지 내려갔다. 그곳을 떠나면서는 자주 보지 못하지만 오래 보자고 말했다. 인생을 함께, 오래 볼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훗날 하경이 연주에게 ’그동안 수고 많았어. 이만하면 된 것 같아 ‘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 역시 연주에겐 응원이 될 수 있다. 하경이 보내는 응원은 연주가 하는 특정한 일이 아닌, 연주의 인생 자체를 향해 있으니까. 하경은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반 학생에게 작곡한 곡이 있는지 묻는다. 그 학생의 곁을 하경은 또 오래 함께 있어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2화를 봤다. 하경에게 ’으라파 라쿠라쿠!‘를 외치던 연주의 불안한 눈빛을 본 순간부터 밤 버스에서 반 학생이 보내온 음악을 들으며 미소 짓던 하경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실 나도 이런 응원을 바라는 꿈을 가진 사람이라 그랬나 보다. 이 글을 쓰며 떠오르는 얼굴이 몇몇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응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