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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05. 2016

익숙함 속의 무서움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 좋다.

물건이던, 사람이던, 상황이던 익숙해지면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곧 능숙해진다. 마찰은 줄어들고 완벽성은 높아지면서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것에 강한 나는 익숙해지기를 좋아한다.

회사를 옮기고 새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아 속이 상했을 때도,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을 때 익숙하지 않아 근육통에 시달렸을 때도,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익숙함이 과거에 비해 생긴 까닭일까? 익숙해질 그때를 생각하며 조급함을 덜 어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익숙함이라는 녀석 속에 무서운 것들이 숨어 있었다.

자만심, 나태함, 게으름은 익숙해진 상황들을 고마움 없이 당연하듯 여기게 했고, 조금 더 잘 해내기 위한 열심을 잃어버렸으며, 무엇보다 새로운 상황을 귀찮고 짜증 나는 일로 여기게 한다.


익숙함과 나태함.

한 끗 차이로 생기는 아이러니한 상태. 그 사이에서 우린 적당한 선을 유지하기 어렵다.



한글자,  정철 지음, 양보 손글씨


작년 회사를 옮기면서 겸무하게 된 업무 대해 열심히 배우고자 했다. 회사에 익숙해지면 더 열심히 배워야지 했는데 웬걸 10개월이 지난 지금 입사 초기에 배운 수준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이제 곧 1년, 연차를 쓸 수 있게 되면 겸무하게 된 업무 담당자가 휴가를 쓸 텐데... 귀찮아하며 미뤘다가 시험 직전에 벼락치기하듯 배워야 할 판이 되었다.


연초 계획 중 3월 달안에 자격증 학원을 알아보고 끊겠다고 적어놨는데... 작년과 바뀐 건 내 나이와 년도를 나타내는 숫자뿐, 반복되는 일상에 또다시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도전들을 잊어갔다. 겨우 2016년 1/4분기가 지난 지금, 나의 연초 계획들은 귀찮고 불편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왜 스스로를 그렇게 닦달하냐고,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적응하느냐 힘들지 않았냐는 말들에 그래-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나는 안다. 사실 쉴 만큼 쉬었는데 계속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마음이란 게 한번 차갑게 식기 시작하면 활활 타올랐던 때보다 더 무섭게 굳어버리는데, 난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고 자만하며, 손에 힘을 조금 풀었을 뿐이라고 한다. 느슨해짐 틈으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흘려지고 있는데, 위험함을 느끼지만 그마저도 익숙해진 나머지, 다시 끙끙대며 움켜쥐는 힘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쉽사리 먹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쉬었다 가라는 말에 힘껏 동의되지 않는다면 또는 그 말로 자기 자신을 먼저 방어하려고 한다면 이만 인정해야 할테다. 그리고 주위에 생긴 불편함을 감수해 나가야 할 것 이다. 신나게 일하고 마시는 한모금의 커피가 진짜 달달한 것 처럼 익숙함이 주는 달콤함이 진짜 달콤함이 될 수 있도록, 이제 나도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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