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브런치에 '이유를 찾는 여자'라는 글을 올렸다.
나는 누군가 밥을 사준다고 하면 '왜?'라는 의문이 붙었다. 생일과 같이 명백히 축하받아도 되는 날이 아니라면 누군가 베푸는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정적인 상황을 즐기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명확하지 않은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나를 더욱 긴장시켰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확인하는 일처리 방식도, 상황을 통제함으로 실수를 줄이려 했던 것도 전부 비슷했다. 규정과 범주화하며 통제 속에 있으면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할 일이 줄어들어 삶이 편안해진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완벽주의자, 라고 했다.
완벽주의의 모습이 나타난 건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런 것 같다.)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공부도, 운동도 뭐 하나 똑 부러지게 잘 하는 건 없지만 사고 치고 돌아다니는 건 아닌, 반에서 눈에 안 띄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에 반해 언니는 수학올림피아드에 나갈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집에서 당연한 기대를 받는 건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고2 때 방황을 하면서 밤낮없이 열심히 노는 바람에 성격이 급격히 떨어졌고 기대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내게 그 어떤 압박도 주지 않았다. 내가 대학교에 붙었을 때 아빠는 막내가 4년제에 들어갔다며 감탄을 하셨다. 인 서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난 그게 좋았나 보다. 대학교에 들어가 그냥 학교를 꾸준히 갔는데 첫 학기 장학금을 받았다. 원래 1학년 때는 노는 거라는데 놀 줄 모르니 꼬박꼬박 출석하고 과제를 낸 것만으로도 운 좋게 장학금을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 집의 자랑이 언니에서 나로 바뀌었다. 그 성취감과 인정이 4년 동안 장학금을 받게 했다.
좋은 자극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건 과호흡 현상이 처음 온 시기가 그 때였기 때문이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날이었다. 서둘러 씻고 학교를 가면 되었을 텐데 숨이 안 쉬어졌다. 울면서 끄억 끄억 거리는 숨으로 머리를 감은 그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날 내가 늦게 일어난건 고작 10분가량이었다.
지금에서야 이런 증상이 과호흡이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증상이었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병인 줄 몰라 병이 키워지지 않았던 것 이다. 아마 그 증상이 병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난 스스로를 나약하다고 또 과하게 채근했을 테니까.
얼마 전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여러 사정으로 회사의 일부분이 정리하게 되면서 나는 해고되었다. 회사의 사정을 알고 있었고 내리 짐작하던 상황이라 충격이 크지 않았는데, 충격이 크지 않은 게 오히려 충격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전전긍긍하며 스트레스받고 예민 폭발이어야 맞는데, 왜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잘리면 어디 일할 곳이 있을까?,, '나이가 너무 많은데...', '쓸데없이 경력만 쌓였어', '오라는 회사에 가볼까? 그 곳을 거절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근무 날 아빠와의 짧은 통화를 하고 난 뒤 나는 최소 3개월은 편히 놀겠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 뒤로 정말 열심히 놀았다. 글을 다시 쓰자며 노트북과 씨름을 하기도 했고 제주도도 다녀왔다. 작업실을 갖고 싶다는 꿈을 친구들과 나누면서 조금 더 마음들을 모아갔다.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놀라워했다.
"나이가 들 수록 고집스러워지는데 언니는 여유로워져 가는 것 같아. 보기 좋아."
"걱정도 팔자라는 말 언니 두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나이가 들어서 걱정할 힘도 없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나도 걱정하는 게 팔자인 줄 알았다고 함께 웃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걱정하는 팔자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익숙했을 뿐, 사실 꽤 여유로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수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린다고 생각했고,
누군가 나에게 모진 말을 던지면 나는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실수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수도 했지만 잘 끝낸 일들이 더 많았다. 혼이 나고 싫은 소리도 들었지만 그건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한 행동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나란 사람 전체가 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반대로 나란 사람 자체가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괜찮아질 수 있었다.
이렇듯 어떤 사람이라는 말에 나를 가두지 않자 나는 어떠한 사람도 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한 것이 마냥 좋은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새로운 모습들을 취하는데 부담이 적어지자 내 DNA에는 없는 줄 알았던 애교라는 녀석도 등장했다. 그동안 좋은 언니, 선배인 줄은 알았으나 다가가기 어려웠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았을 때도 상처가 아닌 위로를 받았다.
흑과 백으로 나누기엔 사람은 너무나 많은 모습을 갖고 있다. 나 역시 그랬다. 규정되지않음에 대해 비로소 나는 자유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