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생일에 달걀 한 판을 선물로 받았다.
생일이 12월이라 나는 아직 만으로 29이라며, 먼저 생일을 맞은 친구들을 찾아가 서른 맞이를 놀리며 축하해주곤 했다. 친구들은 그 간의 수모를 갚는다며 계란 한판과 등장해 야무지게 나의 서른 됨을 축하해주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서른이 되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일상은 여전했다.
오히려 서른을 앞둔 스물여덟, 스물아홉 그 시간이 더 힘들었다. 진로를 바꾸려면 이때가 마지막이란 생각에, 더 나이가 들면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갖기 힘들다는 말들에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찾느냐 방황을 했다. 뒤늦은 사춘기였다. 어쩌면 그 긴장감 때문에 서른을 무탈히 지나갔던 건지도 모르겠다.
서른 하나, 만으로도 꽉 서른이 되자 사람들의 예언대로 하나, 둘씩 "꺾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잘 노는 편은 아니었지만 열두 시가 되기도 전부터 눈꺼풀은 무거워갔다. 조금의 노동에도 온몸에 파스를 붙여야 했고 나의 자존심이었던 높은 하이힐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눈 옆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발견되었고,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인데도 살은 찌고 한두 끼 굶는 걸로(굶을 수도 없지만) 살은 빠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지면서 나를 향한 호칭은 “언니”에서 "이모"로 바뀌었다. 가장 슬펐던 건 나에게 "노처녀"라고 부르는 어르신분들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아, 나 꺾였구나" 이렇게 서른이 됨을 느꼈다.
서른을 몇 년 더 살아보니 서른에 꺾이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년에 언니와 나는 돈을 모아 조촐하지만 아빠의 환갑잔치를 열어 들었다. 비싼 옷은 못 사드렸지만 엄마와 나가 옷도 한벌 해드렸다. 새 옷을 입고 모인 친척들 사이에서 준비한 딸들 자랑을 하는 아빠를 보면서 뭉클하고 뿌듯했다. 말하지 않아도 주말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정들을 정리하고 돌아왔고 부모님의 잔소리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며 데들지 않는 스킬도 만렙을 향하고 있었다.
나 하나밖에 모르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효도지.' 라던 철없던 생각도 서른이 지나자 꺾였나 보다.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두 분이 제발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여전히 아이돌들의 신보를 기다리며 나의 으뜸이들의 기사를 가장 먼저 확인하지만, 시사·뉴스를 틀어 놓고 보내는 시간도 늘었다. 관심의 방향도 이렇게 꺾여가나 보다. 삼십대로 접어들면서는 기쁘고 축하할 일보단 아프고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소식들이 늘었다. 내 문제, 내 삶에 국한되던 기도는 지인들의 문제, 사회의 아픔으로 더 멀리, 많은 시간 쓰이게 되었다.
스스로를 억제된 시선의 방향도 꺾였다.
"여유로워졌어"라는 말에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야."라고 답한 건 농담이었지만 농담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보니 나의 이십 대는 열심히 있었다. 그 나이가 그러하듯.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고 아픔도 있었지만 그 흔들림이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잘 해 왔고 버텨왔고 그래서 이겨낸 일들이 실수하고 실패해서 도망친 일들보다 많았다. 스스로를 한 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 곁에 너무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내가 무능하고 못나고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가 아닌 주변으로 눈을 돌리자 찾을 수 있었다. 지난 십 년이 나를 믿어줘도 된다는 증명을 해준 셈이니 나의 여유는 나이가 들어서 생긴 게 맞다.
이 글을 사십, 오십, 육십 넘은 어른분들이 보신다면 귀엽다, 할 것이다. 그분들은 더 많은 꺾임을 겪으셨을 테니, 아직 서른인 너는 어리다며 젊은 그때에 더욱 실수도 실패도 해보라고 괜찮다고 하실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내게 그러하시는 듯, 어른들의 무르익은 삶은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의 방향을 꺾어 아래로 향하는데, 그렇다면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서른을 무르익어가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무르익은 벼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듯, 나의 삶이 주변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서른의 꺾임, 그 시작을 단단하게 받아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