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 나게 사는 중.

by 양보

첫 직장으로 북카페를 선택했다.

책을 좋아하고 커피는 더 좋아하니, 내게 이만한 직장도 없었다.


상상했다. 커피와 책이 주는 우아하고 지적인 분위기 속에 일하던 바리스타와 사서의 모습을. 그리고 그 모습이 내 모습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예상하지 못 한 환경으로 데려다 놓았다.


출근과 동시에 운동화로 갈아 신고 목장갑을 착용한다. 대대적인 재고 관리의 날에는 마스크까지 껴야 한다. 책은 생각보다 먼지와 손에 작은 상처를 무수히 만들어 냈다. 커피를 만들면서 손에 물이 닿을 때면 상처들이 붉게 올라왔다. 하얗고 예뻤던 손은 점점 거칠고 투박해졌으며, 허리와 팔목에 파스 마를 날이 없었다. 북카페 일은 생각과 달리 엄청난 노동의 현장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인근 회사원들이 커피를 사러 들렸다. 캐주얼한 정장에 사원증을 목에 메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체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장면이었다. 커피 가루와 책 먼지에 찌든, 이 폼 나지 않은 모습을 나를 아는 사람이 보지 않길 바랬었다.



기간제 교사로 고등학교에 출근하게 된 고하늘(서현진)은 반나절만에 왕따가 된다. 기간제 교수 중 낙하산으로 채용된 교사가 있다던데, 그게 바로 고하늘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채용에 비리는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정황이 그녀의 진심과 진실을 왜곡하고 소문을 사실로 만들었다. 그 덕에 그녀는 출근 첫날부터 혼자 밥을 먹고, 업무에 관한 내용도 공유받지 못해 버벅거린다. 조직에서 눈 밖에 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단편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을 때마다 함께 숨을 고르고, 눈물을 참았다. 1화를 보는 내 내 두 손을 마주 잡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 녀는 첫 출근 날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첫 시작을 이렇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박성순 부장(라미란)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멋있는 것만 골라하고 싶으면 지금 나가는 거 좋아요.
어쨌든 먼저 학생 포기하는 선생은 선생 자격 없는 거 아니겠어요?





고하늘은 박성순 부장의 말을 귀담아듣는다. 방학 기간 동안 매일 같이 교무실로 나온다. 대게 비어있는 교무실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박 부장이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지만, 고하늘은 냉대와 무시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개학 날, 그만두었을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고하늘은 출근을 한다. 1화 마지막 씬에서 교무실 문을 열기 전 그녀의 모습은 처음 학교에 인사하러 온 그 날과 달랐다. 방학 동안 수 없이 냉랭한 교무실 문을 열면서 그녀는 반 계단 정도 성장한 셈이다. 드디어 문 안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뭐해요. 들어와요.


생각해보면 인생은 자주 우리의 계획을 뒤엎었고, 예상하지 못 한 자리로 보냈다. 그리고 그곳은 대게 폼이 안 나는 자리였다. 당시 예상하지 못했던 그래서 폼 안 나는 일은 사회 초년생 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놈의 인생은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번번이, 자주 폼 안 나는 일을 시킨다. 그나마 양심적인 건, 그 시간을 보내면 귀한 지혜를 나눠준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절 맺어진 인연들을 선물오 받았다. 그러니 그런 순간마다 그만두었다면, 정말 아무것도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녀는 폼 안나는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을 묵묵히 감당했다. 그 결과 박 부장은 그녀를 향해 안으로 들어오라 말한다. 나는 그 말이 그녀를 자신의 조직에 받아들이겠다는 사인처럼 들렸다. 폼 나지 않고, 예상했던 모습과 다르고, 너무 힘들지만 그 어두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 그녀의 모습이야 말로 사실 엄청나게 폼 나는 일이 아닐까?


이제 시작하는 드라마 <블랙독>은 어딘가 모르게 <미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감정선의 드라마를 꽤 힘들어하지만, 엄청 폼 나는 하늘과 그런 그녀를 더 폼 나게 해 줄 성순 부장이 전해줄 지혜가 기대된다. 그런 고로 오늘도 주어진 일을 차곡 차곡 해 나가는, 나는 폼나게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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