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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Feb 15. 2020

다시 보기

최민석 에세이 <꽈배기의 맛>을 읽고 있다.


작가는 집에 아무도 없어 사람의 소리가 고플 때면 영화 <봄날은 간다> 나 <냉정과 열정사이를> 틀어 놓는다고 했다. 영화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그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빈 공간에 사람 소리를 채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그런 역할을 하는 작품이 내게도 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카테고리가 드라마와 예능이다.

손글씨 작업을 하거나 드라이플라워를 만들 때 습관적으로 <효리네 민박>을 튼다. 물론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평균 4-5시간이 넘는 작업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게 들을 만큼 플레이 리스트가 풍부하지 못하다. 아마추어인 나는 중간에 플레이 리스트를 수정하기 위해 핸드폰을 잡는 순간 작업의 흐름이 끊긴다.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발견한 건 <효리네 민박>이었다.


<효리네 민박>에는 자연의 소리가 마치 눈에 보이듯 담겨있다. 소란하지 않은 사람 간의 대화나 다정한 웃음소리는 조용한 공간을 따뜻하게 채워준다. 사부작사부작 손이 만들어내는 소리와도 잘 어울려 집중을 돕는다. 그렇다 보니 사람의 소리가 그리울 때, 혼자 밥을 먹을 때도 이 프로그램을 튼다.


이 외에도 계절이나 상황에 따라 다시 보는 작품이 있다.

여름에는 <커피 프린스>를 본다. 어린 모습이 이제는 낯설어진 공유를 본다. 프린스 사인방이 과수원으로 단합대회를 간 장면이나 이선균의 집 테라스에서 들려주는 노랫소리, 커피 내리는 소리로 여름을 느낀다.  나름 시원한 액션이 가미된 <태양의 후예>와 납량 특집스러운 <주군의 태양>도 그 때즘 챙겨 본다.


겨울에는 <그 겨울바람이 분다>를 본다. 물론 제목의 영향이겠지만, 드라마 속 겨울이 현실보다 아름다워 종종 꺼내본다. 코 끝 시린 풍경이 두 사람이 처한 현실의 애처로움 극대화시킨다. 춥지 않은 요즘 같은 겨울이면 호빵만큼 생각난다. 첫눈처럼 오겠다던 <도깨비>도 이 계절에 생각난다  


울고 싶은 날에는 <보보경심>을 본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마음이 오해를 받아도 한 결 같이 신의를 지키던 해수를 보면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유치하다 욕하던 드라마인데.. 잘 울지 못하는 사람인지라 슬픔이 가득한 날에는 이 드라마를 핑계 삼아 한바탕 눈물을 흘린다.


잔소리가 듣고 싶을 땐 <낭만 닥터 김사부>를 보고, 지금 겪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위로를 받고 싶을 때 <나의 아저씨>를 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닥터스>를 함께 볼 예정이다. 모든 면에서 다른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성숙해서 좋았다. 사람이 갖고 있는 상처를 이해함으로 사랑하고 싶을 때 <괜찮아 사랑이야>를 또 한 번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본다.


이 중에서도 유독 자주 보는 작품은 <상속자들>이다. 서른 중반이 돼서 보기에 고등학생 이야기는 살짝 유치... 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민호 배우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원이 오빠를 거처, 라헬이와 영도에게 오래 머물러 있다가, 최근에는 동백꽃 여파로 강하늘이 연기한 효신 선배에게까지 시선이 갔다. 벌써 7년 전 작품이다. 정말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봤다. 워낙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서 몰랐는데, 각 각의 인물이 갖고 있는 이야기의 무게가 꽤 컸다.


다시 보면 다른 게 보인다.

스토리에 치중되던 시선이 각 인물에게 향한다. 드라마 속 인물을 이해하며 내 주변을 대입해보기도 한다. 불과 6개월 전에 본 작품이라도 다시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다. 짧다고 느껴지는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자라고 있었다.


이런 작품들은 마치 어린 시절 키를 재던 벽면처럼 느껴진다. 그 사이 이만큼 자랐구나 확인시켜주는 도구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번 보아도 볼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난다는 건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그런 글을 쓰고 싶고,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오랜 세월을 다시 보며 함께해도 좋은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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