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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an 27. 2020

사는 건 요리와 닮았다.

오랜만에 요리를 했다.

음식 솜씨 좋은 엄마와 살다 보니 요리할 기회가 없다. 정확히는 요리할 이유가 없다. 보통 주방에서 내가 하는 일은 설거지 정도. 기껏해야 부모님이 안 계신 날 음식을 데우거나 햄을 굽는 정도다.


그런데 가끔, 일 년에 두세 번 요리를 한다.

물론 요리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수준이다. 하지만 나는 칼을 잡고 재료를 손질하는 과정이 포함되면 요리라고 부른다.


오랜만에 만든 건 <사과 조림>

백종원 선생(국민 요리 선생)님께서 한 프로그램에 나와 사과를 오래 보관하여 먹는 방법으로 <사과 조림>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다. 집에 푸석푸석 바람이 들어간 사과가 생각났다. 재료가 처치 곤란 상태라면 실패해도 부담이 적다. 오랜만에 요리할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시피는 간단했다. 사과를 깨끗이 닦고, 껍질을 벗긴 후 조각조각 적당한 크기로 썬다. 손질한 사과와 함께 물, 설탕, 오렌지 주스(레몬즙 대신), 계피 가루를 넣고 끓는 불에 30분간 휘휘 저어준 뒤 적당히 졸으면 찬 바람에 식혀주면 완성된다.


어려움 없이 준비를 마치고 인덕션에 불을 올렸다. 냄비는 꽉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이. 아무래도 물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았다. 어쩌면 좋을지 고민의 서막이 열렸다. 지금이라도 물을 덜어낼까? 그러면 안에 들어간 주스, 계핏가루, 설탕의 양이 바뀔 텐데? 그래도 괜찮을까? 설탕만 더 넣을까? 머리를 굴려봤지만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레시피를 믿고 따를 수밖에.  30분간 팔팔 끓이라는 레시피를 따라 인덕션 온도를 최고치로 올렸다.


그렇게 십여분쯤 흘렀을까? 바글바글 소리와 함께 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허나 안도감도 잠시. 앞으로 20분을 더 졸여야 하는데 생각보다 물이 줄어드는 속도가 빨랐다. 주걱으로 내용물을 휘휘 저으면서 또 고민에 빠졌다. 이쯤 불을 끌 것인가, 30분을 채울 것인가. 머릿속은 복잡해도 손은 성실히 움직였다.


작년 겨울 멍이 든 딸기로 잼을 만들던 일이 떠올랐다. 잼이나 조림같이 설탕을 고열에 녹인 경우 식는 과정에서도 수분을 꽤 사용한다. 이를 몰랐던 나는 당시 물을 너무 조금 겼고, 딸기 잼은 식는 과정에서 떡이 되었다.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향했다. 나는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오분 가량 지나 불을 껐다.


냄비를 들고 베란다로 가서 찬 바람에 사과 조림을 식혔다. 주걱이 움직여질 때마다 시나몬 향이 퍼졌다. 다행히 사과 조림은 떡이나 잼이 되지 않고 적당한 수분을 가진 채 식었다. 과거 그 날의 마음 아픈 기억이 오늘 빛을 발했다. 뿌듯함에 광대가 터질 듯 므훗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히 식어진 사과 조림을 덜어 식빵 바르고 피자 치즈를 뿌려 오븐에 구웠다. 달콤한 피자빵이 되었다.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보는데 또다시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 맛에 요리하는구나.


설탕이 튀어 굳어진 인덕션을 닦는데, 사는 건 어찌 보면 요리하는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숱한 고민에 흔들리지만 믿고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실한 움직임은 필수. 더불어 실패는 손해가 아니라 다음 도전에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 준다는 사실까지. 요리 과정이 삶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면 과한 해석일까?


믿음을 갖고 성실히 살아가다 보면 삶이 뿌듯해지는 순간도 오겠지.

요리 끝에 이런 통찰을 얻다니... 올 해는 조금 더 많이 요리를 해봐야겠다.




사과조림으로 만든 사과조림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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