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Feb 24. 2020

나와의 채팅

외근이 몰려있는 한 주가 시작되었다.

넉넉한 가방에 지갑과 파우치를 넣고 책을 한 권 넣었다  무료한 이동시간을 알차게 만들어 줄 존재.


다행히 지하철 안은 넉넉하게 비었고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면 포스트잇을 붙이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소장할 목적을 두었기에 연필로 표시하고 있었다. 항상 책 사이에 연필을 끼어 놓았는데... 연필이 없었다. 책에도 가방에도. 집에서부터 흘렸나 보다.


하는 수 없이 책 모서리를 살짝 접었다.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하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양 팔로 껴안고 핸드폰을 꺼내 '나와의 채팅'을 켰다. 마음에 든 구절을 빠르게 입력해 내게 보냈다.


'나와의 채팅'에는 수많은 글이 존재했다.

회사에 문자로 보고해야 하는 반복적인 문구, 주문번호부터 손글씨 작업을 해야 하는 드라마 대사, 글 귀 그리고 문뜩 떠오르는 글감까지. 하루에도 여러 번 나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창은 항상 맨 위에 있었다. 나는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품에 책을 안고 천천히 '나와의 채팅'을 읽었다.

나만 볼테니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거친 생각이 적혀있기도 했고, 완성되지 않은 글들도 많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대답은 없었다. 짧고 조각난 생각들을 읽다 보니 오히려 답답함이 들었다. 예민한 나는 어디로 가고, 이도 저도 아닌 생각만 품고 있는 것일까.


나는 다시 책을 손에 쥐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돈된 문장으로 정화시켰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글귀가 나오면 또다시 '나와의 채팅'을 열었고, 문장과 함께 떠오른 짧은 생각을 적었다. 덜컹이는 지하철 안이었지만 여유롭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곁에 누군가 함께 있었다면? 한번 든 생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책에서 반한 문장에 대해 격렬히 이야기하고 맞장구 쳐주는 이로 인해 훨씬 더 풍족했으리라.

무심한 나 자신에게 물었을 때 돌아오는 것보다, 나를 지켜본 이의 한 마디가 훨씬 날카롭고 때론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위로가 된다.

날씨는 점점 봄을 향해 가는데 거리는 그 어느 겨울보다 차갑고 휑한 요즘이다.

가까이에 앉아 이야기함이 부담이 되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는 표정이 주는 대화의 맛을 줄인다. 어서 모두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길 바람이다.


그리고 내 곁에 앉은 사람이 연필을 스고, 몇 자루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더 할 나이 없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