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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Feb 29. 2020

가능한 만큼만


일 년 만에 요가원으로 가는 길, 마음에 봄이 온 듯 설레었다.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 입고 매트에 누워 누운 나비 자세를 취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세. 이 자세를 위해 운동 10분 전에는 도착하려고 한다. 편안히 누워 쇠골과 가슴을 지나 배까지 숨을 들이마시고 반대 순으로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하루 종일 분주했던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다. 일 년만이 었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편안했던 기억을.


처음 요가를 접한 건 플라잉 요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공중에 매달려하는 요가로 허리, 척주에 무리를 주지 않고 이완시킬 수 있다는 말에 수업을 등록했다.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재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공 들인 수업은 따로 있었다. 정통 요가 중 하나인 아쉬탕가.


정직한 소음인으로 수족냉증이 심했다. 한 여름에도 땀을 흘려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아쉬탕가 수업만 들어가면 머리에서 땀이 뚝 뚝 떨어졌다. 공중에 매달려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요가를 떠나 이 운동, 저 운동 기웃거리다 사정이 있어 6개월 간 운동을 쉬었다. 운동을 다시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나는 요가학원부터 찾았다. 때마침 집 앞에 정통 요가 수업만 진행하는 요가원이 생겼다. 지체 없이 6개월 수강을 끊었다.


오랜만에 아쉬탕가 수업을 듣는데 기특하게 몸이 동작을 기억했다. 하지만 굳은 몸은 이전처럼 쭉쭉 펴지지 않았고 얼마나 했다고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존심이 상해왔다. 조금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다음 동작을 취하려는데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튼요가, 박상아, 제철소


“무리하지 마세요. 단계별로 동작을 알려드리니, 가능한 동작에서 유지하시면 됩니다. 코 끝 숨에 집중하세요.”


내가 요가를 그리워했던 또 하나의 이유가 떠올랐다.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데 까지.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이 이야기가 그리웠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건 익숙하지 않다. 안 되는 건 없다, 까라면 까,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생존 현장에서 나 혼자서 무리하지 않는 선을 지킨다는 건 양심 없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면 내 안에서 나를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할 수 있잖아. 좀 더 해봐.’


그렇게 퇴근을 미루고, 식사를 미루고 몰두한 주에는 몸살이 찾아왔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수업이 그렇지 않겠지만 다른 운동을 배울 때는 유독 선생님으로부터 ‘한 번 더’, ‘한 세트만 더’, ‘오초만 더’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10개 하고 하나 더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더하면 선생님은 또다시 한번 더를 외친다. 앞선 기록을 깨 보자고 한다.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갱신함으로 얻는 성취감도 있지만 운동이 끝난 후 개운함 보다 뻐근함과 결리는 증상이 생겼다. 이에 대해 말하자 선생님은 근육통은 다음 날 운동으로 푸는 거라고 매일 나오라고 했다. 하지만 기초 체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내게 근육통은 적당한 선에서 풀어지지 않고 병이 돼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남들과 다른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는 A코스를 3세트씩 하고 다음 날 하는 고강도 운동이 몸을 풀어 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아니다. 무리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선생님 말을 들으며 앞서 나가는 마음을 코 끝 숨에 집중한다.


그리고 머문다.

멈춰서 끝내는 게 아니라 가능한 선에 우선 머문다. 그곳에서 천천히 동작을 완성해 나간다. 내 호흡에 맞게.


요가를 마치고 나서는데 한 중년 남성분이 상담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분은 나이도 많고 남자인 자신이 요가를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특이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제 동작하느냐 내 옆에 누가 있는지도 잘 몰라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 맘을 아셨는지 선생님도 같은 말을 했다.


“음.. 안 그럴걸요? 다들 자신의 수련을 하느냐 바쁘거든요.”

무리하지않는선에서, 한수희, 휴머니스트

요가를 하면서 나는 동작뿐만 아니라 ‘가능한 선’에 머무른다는 것도 배운다.

아무도 내게 해주지 않은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능한 만큼만’ 해도 된다는 말로 나 자신을 알아가고도 있다. 그리고 길게 이어지는 호흡처럼 삶의 일들을 부드럽게 연결시킨다. 더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게 말이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 다시 요가원 매트에 누워 몸과 마음의 평온함을 느껴볼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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