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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Oct 16. 2015

상속자들

이 마약 같은 드라마.


드라마이지만  현실감 있는 표현과 디테일한 구성, 무엇보다 찰지고 중독성 있는 대사로

이름만 들어도 기대하게 되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 중 내가 오래 사랑하고 있는 드라마 <상속자들>


재벌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러브스토리.

거기에 고등학생 신분이라는 점에서 "꽃보다 남자"를 떠올렸었다. 그래도 김은숙 작가님 작품이니 무언가 다르겠지 기대했고, 이번에도 내 취향을 저격했다.  재벌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사랑은 그들에겐 로맨스 일지 몰라도 밖에서 보는 시선과 현실은 어떠한지 탄이의 약혼녀인 라헬의 대사를 통해 정확히 짚는다.  드라마가 주는 환상 속에서 보여 준 현실의 모습은 예상보다 적나라했고 명확했다.


재벌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사랑은 이미 진부하고도 식상한 소재다. 게다가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라면 유치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을 부자인 부모를 만나 편히 사는 철없는 애들로 볼지도 모른다. 대부분 드라마 속 재벌 2세가 그렇게 그려졌으니까.


"그보다 먼저 우리 서열 정리부터 제대로 해야지. 너네 집 뭐하니 졸부면 얼마나 졸분데?
 난 이제 좀 알아야겠다."
"유치하다. 진짜."
"짜증 난다. 진짜. 김탄이랑 나 약혼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
"요점이 뭔데"
"걔랑 나랑 연애한단 소리가 아니라 기업과 기업이 약속을 했다는 뜻이야-
 주식을 나누고 기술을 공유하고 몇 억일지 몇 조일지 모르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는 딜이라고!
 이게 유치해? 넌 지금 이 거대한 약속에 껴든 거야.. 근데 이게 유치해!"

                                                                                                                            #9화


하지만 탄이의 약혼녀 라헬의 대사만 봐도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져야 하는 책임감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배우며 자랐다. 부자인 부모 밑이라고 쉽게 얻은  건 없다. 사랑도 진로도 마음대로 선택해본 적 없다. 언제나 치열했고 외로웠다.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이 어른인 척 살아가는 모습은 그래서 더 잔인하고 때론 슬펐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애써서 사는 아이들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 봐도 유치하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주인공들의 신분이 학생이라는 설정은 그들의 한계가 되는 게 아니라 이렇듯 다름을 그려내게 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세상 앞에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가 가진 상처를 무뎌진 어른들에 비해 훨씬 빨리 알아차렸다. 더 늦기 전에 내밀어진 손을 잡고 화해를 했고, 상대의 선택을 존중했으며, 응원했고 다른 것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치기라고 한다면 난 그 치기 어림이, 열정으로 보였다. 부러웠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사람을 드라마 속 인물 중에 고르라면 아마도 원이, 탄이의 형 원일 것 같다. 드라마 <상속자>를 몇 회나 정주행 할 수 있던 건 볼 때마다 마음이 가는 인물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처음 드라마를 보고 약 8년이 지난 지금 내 마음엔 원이 남아 있다.

이 드라마의 부제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이다. 재벌들의 화려한 일상을 기대했다면, 오히려 본 드라마는 모든 표현에 있어서 절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관을 쓰려는 자들이었고, 그들이 져야 하는 무게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 드러난 장면은 마지막 회였다.


어렵게 둘의 사이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탄이와 은상이가 10년 뒤를 꿈꾼다.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담은 탄이의 상상 속에서 정말로 모두가 행복하다. 자신들이 원하던 일을 하고 있고 모두 성공한 모습이다. 사실 두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니 두 사람의 사랑이 결혼으로 마무리될 순 없으니 미래를 꿈꾸는 엔딩이 나름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상상 끝엔 현실이 나온다. 아버지의 서재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곳을 지키던 아버지 대신 원이 그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성취는 전혀 낭만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에 갇힌 라푼젤의 모습처럼 보였다.


"기사 뭐야, 형 결혼해? 이렇게 갑자기 무슨 결혼이야!"
"회사 방어하는 거 우리 둘만으로는 위험해. 그게 이 결혼이 필요한 이유야....
  그게 내가 쓸 왕관의 무게고.."
.
.
.
'서재의 주인이 바뀌었다. 형은 오르고 싶은 곳에 올랐고 더 단단해졌으며
 밤엔 울었다....
 형의 유배지는 형이 평생 살아온 이 집이 아닐까'


원이, 현주와 대조적인 탄이와 은상. 도망치려는 은상이의 손을 놓치지 않고 잡았던 탄이와 달리

결정적인 순간 오지 않았던 원이를 기다리던 현주는 '오늘이 그 날인가 보다, 우리 헤어지는 날' 이라고 체감했고, 자신의 엄마로부터 모진 말을 들은 은상을 위로하기 위해 새벽까지 돌아다니던 탄이와 달리 아버지이자 회장님으로부터 상처 입은 현주에게 원이는 가지 않는다. 다른 결론을 빚는다. 어쩜 원이와 현주의 미래 모습은 윤재호(최원영)와 이에스더(손윤하) 일지도...


그렇지만 원이가 야망 있고 욕심적이었다보단 탄이와 달랐을 뿐. 그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이 원이가 쓸 왕관의 무게였고, 어쩌면 원이 덕에 탄이의 사랑이 이어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원이에게 마음이 남았나 보다. 그가 사는 세계는 드라마라기보단 현실에 가까웠으니까.


그렇게 우리의 삶에도 각자 쓸 왕관의 무게가 있는 듯하다.

꼭 거대 재산의 상속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태어났기에 저마다 갖는 인생의 무게 하나 둘 쯤, 우리 모두 있지 않은가. 다만 어리다, 불가능하다, 두렵다 등의 이유로 피하려 하기 보단 실수하고 넘어지고 때론 도망치는 방법의 형태일지라도 감당하려는 어린 주인공들을 보면서 과연 나는 인생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게 하는 관점이 달라져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그저 이런 성장물도 너무 좋다. 고

정리하고 싶다.

상속자들, 10화 탄이, 양보 손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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