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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20. 2020

'love yourself'로부터 자유해지기

영화 <벌새> , 2018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가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 이를 테면,


지하철을 방향 반대로 타거나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친 때, 오탈자 지적을 받을 때, 지출 증빙 영수증 잃어버렸을 때(하...), 걷다가 발일 삐끗하거나 트렌치코트 끈을 길에 질질 끌고 다닐 때, 인쇄물이 양면이나 1페이지에 두쪽으로 나올 때조차 내가 싫다. 나를 칭찬하는 순간도 부끄럽다. 그들이 보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알고 있기에 , 당신은 속고 있는 거라는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어 진다. 그러면 칭찬한 사람이 무안해진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저 입을 닫고 아무것도 들키지 않고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 내가 싫은 건 변하지 않는다.


꼼꼼하지 못해 싫고, 무능해서 싫고, 약해서 싫고, 못돼 먹어서 싫고, 멍청해서 싫다. 하루를 꼼꼼히 뜯어봐도 나를 사랑하는 순간보다 부끄럽고 책망할 순간이 더 많이 보인다. 그중에서 가장 싫어지는 순간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표현들을 마주할 때다.


현재, 오늘을 중요시 여기는 현시대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으로 'Love yourself'를 말한다. 누군가의 인정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다른 사람도 너를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이 모양인가. 또다시 부정하는 뫼비우스의 띠가 가동되면서 나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좌절감과 함께  'Love yourself' 앞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러면 나는 드라마를 본다. 잠을 자면 좋으련만 생각 많은 머리는 쉽게 잠에 들지 않고 나를 미워할 수백 가지 이유를 만든다. 차라리 무언가에 홀리게 하는 편이 낫다. 나를 사랑하기는 어렵고, 미워하기는 싫으니 지난 드라마를 보며 잊어볼 심산이다. 하지만 그렇게 본 드라마는 남는 게 없다. 정신과 체력이 피폐해진다. 얇게 묻으니 부정적인 나와 대면하는 일이 잦다.


영화 벌새




은희가 영지에게 묻는다.

선생님도 자신이 싫어진 적이 있냐고.

영지 역시 자주 자신이 싫었고, 그런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좋은 대학을 다니고 있는 똑똑한 선생님도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는 말에 은희는 놀란다. 하지만 이내 곧 영지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다.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영지는 자신이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했다.

나처럼 사랑하려고 애쓰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지쳐 좌절하지도 않았고, 현실을 도피하지도 않았다.  대신 대면하여 보는 시간을 가졌다.


비록 들여다보는 일은 따갑고 불편하게 만들지만, 나도 영지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생각해보면 서른여섯 해 나는 나로 살아왔지만 그동안 타인의 장단에 맞춰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도 'Love yourself'라는 말에 갇혀 나를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당장 나를 사랑하면 좋으련만 아직은 어렵다. 다만 미워하는 건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어느 대사를 생각하며 손가락을 한 개씩 움직이는 것처럼, 천천히 마음에 움직임을 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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